사법연수원 43기 최고령 수료생 오세범씨
20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사법연수원에서 수료식을 마친 뒤 최고령 수료생인 오세범 씨가 쑥스럽게 웃음을 머금고 있다. 오 씨는 천안에서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는 큰딸과 육군 소위로 복무하고 있는 작은 딸이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고양=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0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사법연수원 대강당. 43기 사법연수원생 수료식을 앞두고 희끗한 머리에 낡은 가죽 가방을 맨 중년 신사가 빠른 걸음으로 오더니 강당 앞줄 좌석에 앉았다. 구수한 미소를 짓는 50대의 신사는 교수도, 부모도 아니었다. 1시간 뒤 786명 수료생 대표로 선서하는 오세범 씨(59)였다. 43기 연수원생 자치회장인 오 씨는 이날 수료하는 학생들 중 최고령이자 2010년 사법시험 1차 도전 8회, 2차 도전 8회 만에 합격한 총 15전 16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1막. 언어학자 꿈꾸던 서울대생 보일러공 되다
○ 2막. 불혹의 나이에 사법시험 도전 그리고 15년
오 씨는 자신의 해고가 부당하다며 직접 해고 무효 소송을 진행했다. 2년간 소송을 준비하며 노동법 지식을 쌓아 갔다. 결국 패소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김칠준 변호사를 만났다. 오 씨는 김 변호사의 소개로 법무법인 다산의 노동법 전담 사무장으로 일할 수 있었다. 해고 무효 소송을 준비하며 도움을 받은 석탑노동연구원의 장명국 대표를 만난 인연으로 1993년부터 내일신문 설립에 참여해 업무기획실장으로 4년간 일했다. 하지만 언론사 간부는 자신이 잘하는 일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상담할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1997년 1월 1일. 42세가 된 오 씨는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2년 동안 계속 1차에서 떨어졌다. 의욕만 앞섰지 역량이 안 되는 것 아닌가 후회가 밀려왔다. 1년만 더해 보고 그만두자고 했는데 2000년에 1차에 처음 합격했다.
“아내가 고생이 많았죠. 학습지 교사 등을 하며 가장과 주부 노릇을 병행했으니까요. 아내는 제게 늘 할 수 있다고 힘을 주었습니다.”
“아빠가 평일 아침 7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들어오는 모습에 딸들도 아빠를 따라 공부한 거 같아요. 일요일만큼은 꼭 딸들과 같이 보냈고요.”
○ 3막. 정년퇴직 나이에 새 출발
“법조인으로서 겸허한 자세로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겠습니다. 수료생 대표 오.세.범!” 자신과 동갑인 최병덕 사법연수원장 앞에서 선서를 마친 오 씨는 강단 위의 선배 법조인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이어 자식뻘인 수료생들에게 허리를 굽혔다. 강당 안을 채운 수료생들의 박수 소리가 더 커졌다. 30년 전 정년 없는 직장을 갖기 위해 보일러 기술을 익혔던 오 씨의 새 직장에도 정년은 없다. 오 씨는 전에 사무장으로 일했던 변호사 사무실에서 변호사로 일할 예정이다. 그는 “장애인 철거민 여성차별 가정폭력처럼 돈은 안 돼도 약자를 위한 소송을 맡고 싶다”고 말했다.
정년의 나이에 새 출발을 하는 새내기 법조인. 카톡에 남긴 말처럼 ‘내가 이 세상의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도록 도울 수 있기를’ 바라는 그의 꿈은 786명의 동료들과 막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