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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59세 새내기 법조인… 정년퇴직한 친구들이 부러워해요”

입력 | 2014-01-21 03:00:00

사법연수원 43기 최고령 수료생 오세범씨




20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사법연수원에서 수료식을 마친 뒤 최고령 수료생인 오세범 씨가 쑥스럽게 웃음을 머금고 있다. 오 씨는 천안에서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는 큰딸과 육군 소위로 복무하고 있는 작은 딸이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고양=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친구들이 자기들은 정년퇴직하는데 저는 새 직장을 구했다고 매우 부러워합니다.”

20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사법연수원 대강당. 43기 사법연수원생 수료식을 앞두고 희끗한 머리에 낡은 가죽 가방을 맨 중년 신사가 빠른 걸음으로 오더니 강당 앞줄 좌석에 앉았다. 구수한 미소를 짓는 50대의 신사는 교수도, 부모도 아니었다. 1시간 뒤 786명 수료생 대표로 선서하는 오세범 씨(59)였다. 43기 연수원생 자치회장인 오 씨는 이날 수료하는 학생들 중 최고령이자 2010년 사법시험 1차 도전 8회, 2차 도전 8회 만에 합격한 총 15전 16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1막. 언어학자 꿈꾸던 서울대생 보일러공 되다

서울대 언어학과 74학번인 그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학자의 길을 걷길 원했다. 하지만 서울대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고 ‘유신 철폐’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선배들이 줄줄이 잡혀가는 모습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학생운동에 뛰어든 그는 1977년 4학년 때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1979년엔 명동 YWCA 결혼식 집회 사건에 가담해 수배되기도 했다. 출소 후 오 씨는 곧장 기술학원에 등록했다. 생계를 위해서였다. 학생운동 전력과 서울대 중퇴 학력으로 취업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정년도 없고 사람들 눈치도 안 보는 기술을 배워 볼 요량이었다. 고압가스 냉동과 보일러 관리 자격증을 땄다. 1984년 보일러공으로 경기 화성시의 제약회사에 들어간 오 씨는 민주화 항쟁 이후 노조 결성 붐이 일던 1987년 회사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 2막. 불혹의 나이에 사법시험 도전 그리고 15년

오 씨는 자신의 해고가 부당하다며 직접 해고 무효 소송을 진행했다. 2년간 소송을 준비하며 노동법 지식을 쌓아 갔다. 결국 패소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김칠준 변호사를 만났다. 오 씨는 김 변호사의 소개로 법무법인 다산의 노동법 전담 사무장으로 일할 수 있었다. 해고 무효 소송을 준비하며 도움을 받은 석탑노동연구원의 장명국 대표를 만난 인연으로 1993년부터 내일신문 설립에 참여해 업무기획실장으로 4년간 일했다. 하지만 언론사 간부는 자신이 잘하는 일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상담할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1997년 1월 1일. 42세가 된 오 씨는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2년 동안 계속 1차에서 떨어졌다. 의욕만 앞섰지 역량이 안 되는 것 아닌가 후회가 밀려왔다. 1년만 더해 보고 그만두자고 했는데 2000년에 1차에 처음 합격했다.

“아내가 고생이 많았죠. 학습지 교사 등을 하며 가장과 주부 노릇을 병행했으니까요. 아내는 제게 늘 할 수 있다고 힘을 주었습니다.”

두 딸도 잘 커 줬다. 첫딸(28)은 의사, 둘째(27)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 소위로 근무하고 있다.

“아빠가 평일 아침 7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들어오는 모습에 딸들도 아빠를 따라 공부한 거 같아요. 일요일만큼은 꼭 딸들과 같이 보냈고요.”

○ 3막. 정년퇴직 나이에 새 출발

“법조인으로서 겸허한 자세로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겠습니다. 수료생 대표 오.세.범!” 자신과 동갑인 최병덕 사법연수원장 앞에서 선서를 마친 오 씨는 강단 위의 선배 법조인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이어 자식뻘인 수료생들에게 허리를 굽혔다. 강당 안을 채운 수료생들의 박수 소리가 더 커졌다. 30년 전 정년 없는 직장을 갖기 위해 보일러 기술을 익혔던 오 씨의 새 직장에도 정년은 없다. 오 씨는 전에 사무장으로 일했던 변호사 사무실에서 변호사로 일할 예정이다. 그는 “장애인 철거민 여성차별 가정폭력처럼 돈은 안 돼도 약자를 위한 소송을 맡고 싶다”고 말했다.

정년의 나이에 새 출발을 하는 새내기 법조인. 카톡에 남긴 말처럼 ‘내가 이 세상의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도록 도울 수 있기를’ 바라는 그의 꿈은 786명의 동료들과 막 시작됐다.

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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