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 ‘초정행궁의 발자취’ 연구“초정약수로 안질-소갈증 등 치료… 가뭄때 마을 집집마다 벼 2섬 하사”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세종대왕이 충북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에 행궁을 짓고 머물며 한글 창제와 조세법 개정 등을 한 사실이 연구 결과 밝혀졌다. 사진은 초정약수 원탕과 어가행렬을 재현한 모습.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제공 동아일보DB
청주시 문화산업진흥재단은 조혁연 충북도문화재전문위원 등과 함께 지난해 8월부터 4개월 동안 ‘세종대왕 초정행궁의 발자취’를 연구조사한 결과, 그동안 궁금증을 일으켰던 △세종이 초정 행차를 하고 행궁을 지은 배경 △어가 행차의 노선 △당시 초정리 풍경 △초정행궁에서의 활동 내용 등의 상당 부분이 풀렸다고 21일 밝혔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세종이 안질(眼疾)과 소갈증(消渴症), 욕창(褥瘡) 등으로 고생을 하자 대신들이 초정약수를 추천했다. 초정약수는 지하 100m 석회암층에서 솟아나 톡 쏘는 맛이 난다. 민간에서는 예로부터 약효가 제일 좋은 7, 8월 한여름 복날과 백중날에 이곳을 찾아 목욕을 하며 더위를 식혔다.
당시 세종이 머물렀던 행궁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1448년 방화로 불에 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역 학계에서는 선암리 ‘주왕(駐王)이 마을’에 행궁이 있었다는 주장과,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토지대장에 초정리 일대 땅 2만여 m²의 소유자가 창덕궁으로 기록돼 있는 점을 들어 초정리에 행궁이 설치됐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조혁연 전문위원은 “당시 정확한 행궁 위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신동국여지승람’ 등의 자료에 따르면 초정원 옆에 있다고 기록돼 있어 이 일대를 발굴해 화재 흔적을 찾으면 정확한 행궁터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초정리에는 세종 이외에도 많은 역사 인물들이 다녀갔다. 세종 시절에는 신숙주, 최항, 황수신, 이사철, 이개 등이 동행했다. 또 세조도 이곳을 찾았고, 조선 후기에는 실학자인 이규경이 다녀갔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8월 초정약수를 방문한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1894∼1970)은 동아일보에 ‘한글순례, 청주에서’라는 특별 기고를 2회에 걸쳐 게재했다. 외솔 선생은 기고문에서 “세숫대야에 약수를 부어 두 눈을 씻으니 세종대왕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느낌”이라며 “세종께서 병환이었지만 초정으로 오셔서 오직 훈민정음 제작에 몰두하셨다”고 적었다.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문화예술부장은 “세종대왕이 초정 행궁에서 보여줬던 다양한 문화정책과 조선 및 근대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연구해 관련 콘텐츠를 개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기우 기자 straw8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