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반년이 지난 이번 정초에 그녀는 털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그동안 유방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에 적응하지 못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면서 스스럼없이 훌떡 모자를 벗었다. 흰머리가 제법 섞인 아주 짧은 머리였다. 평소 새초롬한 성격이었던지라 그녀의 그런 행동이 의외였다.
“남에게 예쁘게 보이는 것 따위는 신경 안 쓰여요. 전에는 헤어스타일이나 옷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집 밖으로 나가길 꺼렸는데 요즘은 이렇게 화장 안 하고 다녀도 너무 좋아요.”
“아플 때 제일 부러웠던 것이 무엇인 줄 아세요?” 식당 주인은 40대의 나이로 투병생활을 하던 시절, 곱게 늙어가는 할머니를 보면 “나도 저 나이까지 살 수 있을까, 나에게도 할머니가 될 기회가 올까” 그런 생각으로 몹시 부럽더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잘 아는 중앙대 김영수 교수는 올림픽도로 옆에 위치한 종합병원에서 간암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을 때 창밖을 내려다보면서 한강 둔치를 달리는 사람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살아서 병원을 나간다면 꼭 마라톤을 하겠다고 결심했다는 그는 퇴원 후 지금까지 14년 동안 마라톤 완주 260회의 대기록을 세웠다.
나을 수만 있다면 아파보는 것처럼 깊은 인생 공부가 없다지만 기왕이면 아프지 않고 깨달으면 더 좋지 않을까? 꾸미지 않아도 건강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 세월 따라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것이나 내 발로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소망이라는 것을 건강할 때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미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로 들어선 셈이다.
윤세영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