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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스케치]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흥행 질주 비결은

입력 | 2014-01-25 03:00:00

“왕자님도 별수없군!”… 디즈니 왕국 공주들의 반란




1990년대 이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공주들은 능동적,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겨울왕국’(위),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뮬란’(아래 왼쪽부터). 동아일보DB

지난주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흥행 질주가 심상치 않다. 사흘 만에 100만 관객을 가뿐히 넘겨 영화 ‘변호인’을 제치고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국내에 선보이기 전부터 큰 기대를 모았던 터다. 전 세계 박스 오피스 1위, OST 빌보드 차트 1위, 골든글로브 최우수 애니메이션 수상에다 개봉 한 달 만에북미에서 2억30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달성하면서 애니메이션 최고 흥행 수입 기록인 ‘라푼젤’(2011년 개봉)의 2억 달러를 갈아 치웠다.

관객 리뷰에서도 기록만큼이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팬들이 주목하는 것은 ‘디즈니의 변화’다. “디즈니 공주 하면 사랑 얘기였는데 이번엔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었다”(멍멍언니), “남녀가 키스를 나누는 걸로 마무리되지 않는다니”(minemi),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대한 디즈니의 반전”(jumpoo) 등이 그렇다.

‘그래서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 ‘겨울왕국’은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공주와 행복하게 사는 건 왕자가 아니다. 게다가 공주와 남자의 사랑이 전체 스토리에서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겨울왕국’의 두 공주 엘사와 안나는 디즈니의 선배 공주들의 전형을 뒤집었다.


남자 영웅 대신 모험을 떠난 ‘겨울왕국’의 공주

엘사와 안나는 에렌델 왕국의 공주다. 언니 엘사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할 수 있는 마법을 부릴 수 있다. 마법을 숨기며 살아온 엘사는 이웃나라 왕자와 결혼하겠다는 안나에게 화를 내며 반대하다가 실수로 마법을 부린다. 죄책감으로 인해 엘사는 사라져버리고 안나는 얼어붙은 왕국의 마법을 풀고자 언니를 찾아 떠난다.

이 플롯은 흥미롭게도 ‘영웅서사’의 패턴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로 대표되는 영웅서사는 영웅이 모험을 떠나고 시련에 부딪치면서 주어진 ‘미션’을 해결한 뒤에 처음 떠났던 곳으로 귀환하는 형식을 갖고 있다. 주목할 것은 영웅서사의 영웅들이 남성인 데 반해 디즈니의 ‘겨울왕국’ 서사는 여성을 모험의 궤도에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안나는 왕자를 만나서 사랑을 이루는 과업이 아니라 얼어붙은 왕국에 봄을 되돌려야 한다는 미션 때문에 모험을 떠난다.

‘영웅서사’는 결론이 아니라 주인공의 성장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겨울왕국’의 전개과정도 이와 흡사하다. 기존의 디즈니 공주들과 달리 이 이야기는 안나가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지, 결혼을 하는지 마는지가 중요한 얘기가 아니다. 언니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안나가 얼마나 성숙하는지, 무엇을 깨닫는지가 이 애니메이션의 주요 주제가 된다. 한눈에 반했던 왕자님의 시커먼 속내도 확인하고, 멋도 모르고 휘두른 마법으로 자신을 다치게 했던 언니의 죄의식을 알게 되면서 마음의 상처도 이해하게 된다.

관객이 엔딩에서 확인하는 안나의 모습은 왕자의 키스로 깨어나는 공주가 아니라 어려움을 이겨내고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성이다. 여기에다 그렇게 주체적인 삶을 살게 된 안나가 선택하는 남성이 우직한 얼음장수라는 점에서 이 애니메이션은 ‘판타지’에서 멀어진다. 오히려 확 깨게 만드는 ‘리얼리티’에 가깝다. 선배 공주들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에 대한 그간의 비판을 디즈니가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공주들

수동적 여성상이라는 비판을 받은 ‘신데렐라’. 동아일보DB

디즈니 공주의 역사는 19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그것이다. ‘머리는 흑단 같이 검고 피부는 눈처럼 하얀’ 미모의 10대 공주는 천부적인 그 미모로 인해 마녀인 새엄마의 미움을 받게 된다.

성에서 쫓겨난 백설공주가 운 좋게 일곱 난쟁이들의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하는 일은 ‘살림’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백설공주는 청소를 하고 침대를 정리하는 등 집안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주부’의 역할을 맡고 있다. 더욱이 사과장수로 변장해 찾아온 계모의 비슷한 수법에 몇 번이나 속아 넘어가는 그 모습은 순진하다 못해 바보스러울 정도다. 순종적이고 전형적이지만 뭔가를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백설공주는 왕자님의 키스에 운명을 기대는 수동적인 여성으로 비쳤다. 당연히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이 뒤따랐다.

또 다른 ‘살림의 여왕’ 신데렐라(1950년)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새엄마와 새언니들에게 온갖 구박을 받는 이 여성의 임무 역시 마루를 닦고 바느질을 하는 것이었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용어가 유행하는 등 신데렐라의 이름은 ‘남성에게 의지해서 안정된 삶을 꾀하려는 여성’의 대표 격으로 쓰일 정도였다. 출생 신분으로는 공주가 아니지만 결국 왕자와 결혼함으로써 신분 상승을 하는 설정도 이런 비판을 돋우었다.

하지만 2011년 만화평론가 미르나 월든은 미국의 여성영화 전문 온라인매체 ‘비치 플릭스’에 실은 기고문 ‘당신은 공주를 나쁘다고 말하지만(Animated Children's Films: You Say Princess Like It's Bad Thing)’에서 신데렐라가 ‘언니’인 백설공주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며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녀가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계모 가족들의 학대와 따돌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도회에 동등하게 초대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계모가 신데렐라에게 드레스를 만들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방해하자 그녀는 무도회에 못 가게 되더라도 실망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는데, 거기에서 그녀의 강한 성격이 더욱 드러난다.”


1990년대 이후의 능동적인 공주들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잠만 자고 있어서 존재감조차 희미했던 ‘잠자는 숲속의 공주’(1959년)의 오로라 공주 이후 디즈니 공주의 역사는 휴면기에 들어갔다. 새로운 공주가 탄생한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나서였다. 바로 ‘인어공주’(1989년)의 주인공인 호기심 많은 빨강머리 공주 아리엘이다. 아리엘은 디즈니 공주 역사의 터닝 포인트다. 안데르센 원작의 처연한 비극을 로맨틱 코미디 같은 내용으로 바꿨을 뿐만 아니라 주인공 캐릭터에 놀라운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리엘은 물론 여전히 왕자와 사랑에 빠지는 디즈니 공주이지만 사랑에 눈뜨기 전부터 자신이 속한 바다를 벗어나려는 욕망이 강한 소녀다. 더구나 이 여성은 신데렐라처럼 왕자가 유리 구두를 들고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물 밖으로 나서는 결단을 내린다는 점에서 앞선 공주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미녀와 야수’(1991년)의 여주인공 벨은 또 어떤가. 남녀 간의 대화는 낯간지러운 내용이 대부분이었던 과거 애니메이션과 달리, 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남녀의 동등한 대화가 가능해진다. 벨은 야수를 어려워하지 않고, 야수의 잘못을 지적하고 따지는 여성이다. 호감을 가진 이성에게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아리엘과 함께 ‘새로운 세대’의 공주로 조명받았다.

‘벨 이후 공주의 계보를 유색 인종이 이어 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알라딘’(1992년)의 아랍공주 자스민, ‘포카혼타스’(1995년)에서 인디언 추장의 딸로 나온 포카혼타스, ‘뮬란’(1998년)에서 중국의 여성 무사로 등장한 뮬란이 그렇다. 다른 얼굴색만큼이나 그 행보도 앞선 공주들과 달랐다. 포카혼타스는 사랑하는 백인 남성을 따라가는 대신 자신의 부족에 남는 ‘새드 엔딩’을 맞는다. ‘뮬란’에선 아예 남녀의 사랑 도식을 빼버린 채 여주인공을 중성화해 나라를 구하는 여전사로 오롯이 세운다.

‘뮬란’ 이후 11년 만에 나온 ‘공주와 개구리’(2009년)에서는 티아나라는 흑인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티아나는 성실하게 살아가는 식당 종업원이며 자신의 레스토랑을 개업한다는 꿈을 갖고 있다. 그녀는 개구리 왕자의 키스를 받고 개구리로 변한다. 티아나와 왕자가 인간이 되고자 모험을 떠나는 과정은 기존의 왕자와 공주 이야기를 비튼 것이다. 이 왕자는 공주를 구해주는 멋진 남성 역할을 그만둔다. 왕자가 티아나의 레스토랑에서 밴드 연주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데, 왕자가 여성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모습은 이 시대의 달라진 남녀 관계와 세태를 반영한다. 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대사는 흑인공주 티아나가 첫 번째 공주였던 백설공주로부터 얼마나 나아왔고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아가, 별에게 빈다고 모든 것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란다. 너 자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노력해야 별도 소원을 이뤄주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너 자신을 믿는 거야.”

최근작 ‘겨울왕국’에서 마법을 풀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남녀의 사랑이 아니라 끈끈한 자매애로 설정한 것은 2010년대의 디즈니 공주가 ‘왕자’의 강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틀을 깨고 나오는 공주들과 달리, ‘공주와 개구리’의 유약한 왕자나 ‘겨울왕국’의 사기꾼 왕자 등 디즈니 왕자들의 모습이 갈수록 왜소해지는 것도 흥미롭다. 최근 미국의 시사잡지 ‘애틀랜틱’에서 비평가 애커시 니컬러스는 “암울한 소식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소녀들이 그렇게 비틀린 왕자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날 경우 남성에 대한 불신을 갖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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