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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命]권노갑 회고록악연의 시작 2

입력 | 2014-01-25 03:00:00

DJ, 총선 불출마 선언한 내게 ‘靑 정치고문’ 자리 약속




15대 대선 직전인 1997년 9월 동교동 비서 출신 의원들의 집단 기자회견. DJ(김대중)가 당선되면 임명직 공직에는 일절 진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자리였다. 왼쪽부터 설훈, 김옥두, 한화갑, 남궁진, 최재승, 윤철상 의원. 권노갑 고문은 ‘한보 사건’으로 구속수감 중이었다.

○당 고문으로 복귀

(도쿄 뉴오타니 호텔로 찾아온 최규선을 만난 뒤) 나는 1998년 말 귀국했고, 다음해 새정치국민회의 상임고문으로 당에 복귀했다. 이때 나는 도쿄에서의 약속대로 최규선을 보좌역으로 채용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최규선을 좋지 않게 평하는 소리도 있기에 나는 그를 채용하기는 했어도 어떤 미션 같은 것은 따로 주지 않았다. 그저 고문실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하는 정도의 역할밖에 맡기지 않았다.

2000년 4월 13일에 16대 총선이 있었다.

이에 앞서 당 내외에서는 국민회의를 전국정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고, 이에 부응해 그해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이 새로 창당되었다.

민의를 반영하자면 16대 총선에서는 각 지역과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젊은 피’를 수용해야 했다. 그러자면 구(舊) 정치인들의 출마를 억제시켜야 했다. 나는 오랫동안 함께 정치해온 동지들의 출마를 만류하기 위해 그해 2월 8일 나 자신부터 지역구나 전국구에 불출마한다는 선언을 했다.

사실 나는 귀국 후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하려고 상당한 준비를 해 왔으나 대통령이 맡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그 자리를 김희선 씨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나는 당 총재인 대통령의 뜻을 받아 공천과정에서 교통정리에 나섰다. 그 때문에 나는 당 내외에서 ‘저승사자’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정치고문

당시 대통령은 내가 불출마하는 대신에 청와대 ‘정치고문’ 자리를 굳게 약속했다. ‘정치고문’은 역대 정권에 없던 새로운 자리로 그 위상은 비서실장보다 위였다.

대통령은 내게 약속한 후 한광옥 비서실장에게 청와대 안에 ‘정치고문실’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사실은 당시 대통령과 나, 한광옥 실장, 그리고 그때까지도 나와 모든 문제를 긴밀하게 의논하던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만 알고 있었던 비밀이었다.

그런데 내 주변에서 보좌역으로 맴돌던 최규선이 낌새를 눈치 채고 불출마 이후의 내 행보를 묻기에 앞으로 청와대에 들어가게 될는지도 모르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되면 너를 내 비서로 데리고 들어갈 테니 네 원도 풀리지 않겠느냐?”

“네, 그렇게만 된다면야 모략을 당한 일도 시정되겠지요.”

최규선은 몹시 기뻐했다.

그런데 그는 입이 가벼웠다.

인사란 발령이 날 때까지 함구하고 있어야 되는 건데, 그만 어떤 기자에게 “권노갑 상임고문이 곧 청와대 정치특보로 들어갑니다”는 이야기를 흘렸고, 이것이 모 일간신문에 실리고 말았다. ‘정치특보’가 아니라 ‘정치고문’인데 내가 구체적인 얘기를 해주지 않으니까 자기 상상으로 그런 타이틀을 생각했던 것 같다.

대중정치를 해 오신 대통령은 여론과 언론에 민감한 편이다. 매일 신문을 보시는데 이 기사가 대통령의 눈에 안 띄었을 리가 없다. 최규선이 언론에 흘린 것이 아니라 내가 언론에 흘린 것으로 오해하셨을 것이다. 한 번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 인사계획이 세간에 먼저 알려지면 야당과 언론의 공격이 시작되고, 이러쿵저러쿵 잡음이 나게 마련이다. 나는 낭패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대통령은 그 이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이렇게 되어 나의 청와대 입성과 ‘정치고문’ 자리 신설은 없던 일로 되고 말았다.

최규선이 청와대 비서관에 내정되었다가 탈락하게 된 배경도 마이클 잭슨의 북한관광 투자 일을 성사도 되기 전에 언론에 흘렸기 때문인데, 이번에도 그 입놀림으로 나까지 무너뜨린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15대 대통령 당선 이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파견 공무원이던 김은성 씨가 국정원 제2차장에 임명되었을 때, 나는 아무런 지시를 내린 일이 없는데 최규선이 주제넘게 김은성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2차장이 되었으면 권 고문께 인사를 해야 할 것 아니냐?”고 다그쳤다고 한다. 그리고 정작 나한테는 “김은성 차장이 고문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하니 한번 만나보시지요” 하는 식으로 둘러댔다.

이렇게 해서 문제의 김은성 차장이 신라호텔 커피숍으로 나를 찾아오게 되었다. 악연이 악연을 불러들인 격이 되었다.  

▼ “언제까지 희생해야…” 울부짖은 김방림 ▼
권 고문의 세 번째 불출마 기자회견 뒤

DJ(김대중)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15대 대선 직전 권노갑 고문을 비롯한 동교동계 비서 출신 현역 의원들이 “앞으로 선출직 외에 임명직은 어떤 자리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YS(김영삼)의 상도동계 출신들처럼 ‘가신(家臣) 정치’로 구설에 오르는 전철은 밟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권노갑은 그때 말고도 세 번이나 ‘불출마’를 약속해야 했다. 첫 번째는 DJ가 19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을 때다. 권노갑은 목포 지역구를 DJ의 장남인 김홍일에게 물려줬다. 13, 14대 총선에서 전국 최다득표를 몰아준 지역구였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백화종 당시 국민일보 정치부장은 기명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비서가 자신이 모시던 사람과 국회의원 배지를 놓고 진흙탕 싸움을 벌인 사례가 한둘이 아닌 정치 풍토에서 자신이 모시던 지도자가 은퇴하자, 그 지도자가 일선에서 차마 못했던 2세의 정계진출 길을 터주기 위해 자기의 자리를 버린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얘기다.”

하지만 16대 총선은 좀 달랐다. ‘한보 사건’으로 구속 상태에서 DJ의 당선을 지켜봐야 했고, 당선된 이듬해 사면복권이 되자마자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권 고문이었다. 권 고문은 재기를 노렸다.

그런데 또 불출마를 선언해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최규선 당시 보좌역의 증언. “무엇보다 사모님의 실망이 컸습니다. 사모님은 DJ어르신이 당신한테 약속한 것이 있었다면서 ‘어떻게 아낙네한테 한 말까지 뒤집느냐’고 낙담했습니다. 권 고문이 구속 상태에서 병 치료를 받고 있을 때 DJ어르신과 이희호 여사가 평창동 자택까지 찾아와 사모님을 위로하면서 ‘대통령이 되면 정계복귀도 시키고 원내진출도 돕겠다’고 약속했다는 겁니다. 그런 사모님과 DJ어르신 사이에서 권 고문도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권 고문의 선택은 DJ어르신의 뜻을 받드는, 순명(順命)이었습니다.”

권 고문은 회고록에서 16대 총선 불출마 선언 이후 DJ가 대통령 정치고문을 약속했다고 썼다. 청와대 안에 ‘정치고문실’이 만들어졌다면, 그의 말대로 역대 정권에서 유례없는 파격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권 고문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던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의 기억은 좀 다르다. “정치고문인지, 특보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런 얘기가 있었다. 그런데 청와대 내에서 ‘부적절하다’는 논의가 있었던 것 같다.”

여하튼 ‘정치고문’이 불발에 그친 뒤 권 고문은 당 최고위원 경선을 준비했다. 마지막 남은 재기의 기회였다. 이번엔 동교동계 내부에서 변수가 생겼다. 한화갑 의원도 최고위원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권 고문은 동교동계의 내분을 막기 위해 세 번째 불출마 기자회견을 갖는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뒤늦게 알고 달려온 김방림 의원이 울부짖었다. “언제까지 ‘권 형’의 희생이 계속돼야 하느냐!”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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