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이 뚜렷하다’
문인수(1945∼ )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뗀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 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박수근의 ‘시장 사람들’
지난주 싱가포르 출장을 가보니 음력 설을 쇠는 나라답게 어디서나 새해 축하 메시지를 접할 수 있었다. 차이나타운에는 말의 해를 상징하는 큼직한 등이 줄줄이 걸리고 호텔들은 붉은 등을 내걸었다. 한국인에게 설 연휴는 민족의 대명절이자 느슨해진 신년의 각오를 또 한번 다잡는 기회다. 마트의 ‘1+1 행사’처럼 신정과 설을 통해 새해를 두 번 맞는 셈이니까. 문인수 시인의 ‘공백이 뚜렷하다’는 홑겹만 달랑 남은 달력을 뗀 뒤 드러난 하얀 공백에서 무상한 삶을 읽어낸다. 시는 가난한 집안의 쌀통처럼 일단 헐어놓으면 하루, 한 주일, 한 달이 야금야금 줄어가는 허전함을 새 달력과 함께 희망으로 채워야 한다고 일러준다.
올해 명절도 고향 가는 길은 번잡할 것이다. 긴 여정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시와 더불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박수근(1914∼1965)의 그림을 골랐다. 우리가 떨쳐버리려 그토록 애썼던 궁핍한 시대의 초상 속에 ‘가난했지만 정이 넘쳐 있던 고향’의 원형이 숨쉰다. 세월이 오래 흘러도 한국인이면 공감할 만한 따스한 풍경, 기억의 곳간을 돌아보게 한다.
얼마 전 전북 진안군 마이산의 탑사를 소개하는 TV프로그램을 보았다. 자연석을 쌓아올린 거대한 돌탑들이 모여 장관을 이룬 곳이었다. 접착제를 쓴 것도 아니고 엉성하게 쌓은 듯한 돌탑들은 세찬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단다. 그 이유를 묻자 스님이 답했다. “돌탑을 쌓을 때 안 흔들리면 무너진다. 조금씩 흔들려야 쓰러지지 않는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것, 그게 돌탑을 지탱한 비결이었다. 하루하루 금세 흘러가도 돌아보면 한 해는 장거리 여행이다. 팍팍한 순간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말 것. 흔들려야 무너지지 않는 것이 돌탑만은 아닐 테니.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25일자 26면 ‘시로 여는 주말’에서 ‘전남 진안군’을 ‘전북 진안군’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