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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감독-서구 인기작가 無… 제도권 비엔날레 틀을 깨다

입력 | 2014-01-28 03:00:00

[‘싱가포르 아트위크’를 가다]<하>싱가포르 비엔날레의 실험




《 지금 싱가포르에서 ‘만약 세상이 바뀐다면’이란 주제 아래 열리는 ‘제4회 싱가포르 비엔날레(SB 2013)’는 제도권 비엔날레의 틀을 깨뜨리는 실험을 시도했다. 우선 예술감독이 없고 큐레이터 27명이 공동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비엔날레마다 단골로 출연하는 서구 거장이나 인기 작가들 대신에 아시아 출신 작가들을 집중 조명했다. 전시장도 한두 곳이 아니라 싱가포르현대미술관(SAM), 국립박물관, 페라나칸박물관 등 9개 장소에 흩어져 있다. 지난해 10월 개막해 올해 2월 16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비엔날레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성찰,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한 꿈을 시각예술로 펼쳐냈다. 국제아트페어 ‘아트 스테이지’와 더불어 비엔날레는 아트위크를 대표하는 양대 기둥으로, 예술과 상업적 측면에서 균형 있는 볼거리를 선사했다. 》     
       


제4회 싱가포르 비엔날레는 큐레이터 27명이 아시아 13개국 작가 82명의 작품을 선보였다. 캄보디아 출신의 스바이 사레트는 군복 옷감으로 만든 거대한 헝겊인형으로 폭력적 체제를 은유했다. 싱가포르=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싱가포르현대미술관이 주최한 비엔날레에는 한국의 문경원 전준호 팀을 비롯해 13개국 82명(팀)이 100점을 선보였다. 작가 중 92%는 동남아 출신으로 동남아 미술에 확실한 방점을 찍었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자랑하는 동남아 각국은 근대 초기 식민지 수탈에 시달렸고, 독립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전통과 공동체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굴곡진 과거, 불안정한 현실, 불투명한 미래를 공유하는 지역 작가들의 시선으로 오늘날 지구촌의 문제점을 짚어보면서 세계 미술계에서 홀대받는 동남아 현대미술의 발언권도 확보하겠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동남아 출신 유망 작가들 집중조명

말레이시아 작가 쿠마리 나하판은 동남아 전역에서 수집한 4t가량의 씨앗으로 설치작품을 만들었다.

전시장들을 둘러보면 그야말로 동남아 작가의, 동남아 작가에 의한, 동남아 작가를 위한 비엔날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5년 아세안 10개국이 단일 경제권으로 출범하는 것과 맞물려 싱가포르가 문화적 구심점이 되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시대적 이슈를 아우른 담론의 제시보다 지역성을 과도하게 내세운 점, 다양한 큐레이터의 관점을 꿰뚫는 방향성이 약한 것은 단점이지만 유망 작가들의 신작(출품작 중 40%) 위주 전시란 점에서 ‘발견의 재미’는 쏠쏠했다.

작가 이름은 낯설지만 주목할 만한 작품이 많다. 1972년생 캄보디아 작가는 국립박물관 로비에 군복의 소재인 위장패턴 옷감으로 만든 헝겊인형 설치작품을 선보였다. 사춘기를 난민수용소에서 보낸 작가가 폭력적 체제를 빗댄 작품이다. 1979년생 미얀마 작가는 ‘병든 교실’이란 제목으로 시골 학교의 1학년 교실을 재현했다. 교육이 국민을 통제하고 속박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현실을 꼬집은 작품이다. 1978년생 필리핀 작가 레슬리 드 차베즈는 쓰레기 하치장을 모티브로 한 그림으로 부패와 탐욕으로 얼룩진 현실을 풍자했다.

개발에 대한 집착 때문에 망가뜨린 자연과 전통의 소중함을 환기시킨 작품도 있다. 건축가 출신 인도네시아 작가는 국립박물관 광장에 대나무를 이용한 쉼터를 만들어 자연친화적 힐링을 체험하도록 했다. 미술관에 식물씨앗 4t을 쌓아놓은 작품, 먹물과 전통 자개 기법을 활용한 설치작품도 인기를 모았다.

CCA의 ‘잃어버린 천국’전도 눈길

아트페어와 비엔날레 말고도 아트위크의 콘텐츠는 풍성했다. 식민지 시절의 군대 주둔지를 예술지구로 개발한 길먼 배럭스에서 작년 말 개관한 난양공대 산하 현대미술센터(CCA)의 ‘잃어버린 천국’전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영국예술대학장 출신 우테 메타 바우어 씨를 초대 관장으로 영입해 여행과 이주, 개인사와 식민지 역사를 탐구해온 아시아계 여성 영상작가 3인전을 꾸몄다. 베트남 태생 트린 민하, 인도네시아의 피오나 탠, 2007년 영국 터너상 후보에 올랐던 인도계 자리나 빔지의 작품은 시적이면서도 강한 메시지를 담아냈다.

영국 패럴렐 그룹과 사치 갤러리가 아시아 작가들을 대상으로 제정한 제1회 국제미술상(푸르덴셜 아이 어워드)의 후보작가전도 주목의 대상이었다. 대상은 호주 화가 벤 퀼티, 조각 부문에선 한국 작가 심승욱이 상을 받았다.

싱가포르=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