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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칼럼/주영하]설날 가래떡 추억

입력 | 2014-01-29 03:00:00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민속학

지난해 말에 아내가 ‘떡국 떡’이란 것을 마트에서 사 왔다. 가지런히 썬 가래떡을 두고 요사이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단다. 심지어 아예 상표명에도 ‘떡국 떡’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떡국의 떡을 두고 ‘떡국 떡’이란 이상한 이름이 붙었을까.

한 웹사이트가 운영하는 뉴스라이브러리에 들어가 검색해봤다. 이미 1969년 2월 11일자 한 신문에 이 말이 나온다. 당시 서울대 사범대의 한 교수가 쓴 칼럼인데, 집에서 직접 떡국 떡을 만들지 말고 시장에서 사라고 제언한다. 너무 많이 사면 좋지 않으니 7, 8명의 식구가 한 관 정도면 된다고 했다.

이 떡국 떡은 지금처럼 썬 것이 아니라 ‘가래떡’을 두고 한 말이었다. 왜 가래떡을 두고 떡국 떡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아마도 떡집에서 가래떡을 만들어 아예 떡국용으로 판매했기 때문에 생긴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1960년대 말부터 시장에서 판매하는 떡국 떡이 널리 유행한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만 해도 음력 섣달그믐, 집에서 잘 일은 멥쌀을 들고 아파트 상가의 떡집에 가서 가래떡을 뽑아오지 않았던가. 이 가래떡을 온 식구가 둘러앉아서 썰었던 기억을 가진 30, 40대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준 할머니들에 따르면 1940년대부터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떡집에서 가래떡을 뽑아 왔단다.

그전만 해도 가래떡은 멥쌀로 밥을 지어 떡판에 부려 놓고 떡메로 힘들게 쳐야 만들 수 있었다. 추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음력 섣달그믐에 온 식구가 마당에 모여서 가래떡을 뽑기 위한 ‘고수레떡’을 만드는 일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고수레떡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가래떡이 금세 완성되지는 않는다. 고수레떡이 식기 전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서 손으로 가래떡을 만들었다. 뜨거워서 찬물에 손을 넣어가며 만든 가래떡 모양을 두고 식구들이 서로 한마디씩 핀잔을 주기도 했단다. 조선 후기 사람 김매순은 ‘열양세시기’에서 조금씩 떼어 손으로 비벼 문어발처럼 둥글고 길게 늘여서 만든다고 했으니, 1940년대를 기억하는 할머니들 추억과 똑같다. 알다시피 가래떡이란 이름도 손으로 떡을 가른다고 하여 생긴 말이다.

지금과 같은 포장 떡국 떡이 시중에 나온 것은 1988년경부터다. 당시에 가장 첨단을 달렸던 백화점에서 이 상품을 개발했다. 그때만 해도 가게에서 팔았던 가래떡 중에는 쌀을 100% 쓰지 않고 밀가루나 전분을 섞어서 만든 것도 있었다. 이것으로 떡국을 끓이면 떡이 퍼져 버려 설날 아침을 망쳤다. 이 모두 쌀이 비싸 생긴 일이었다. 그 틈새를 백화점이 노린 것이다. 이 백화점 떡에 대한 불신은 여전해 1990년대 초반까지도 직접 멥쌀을 들고 떡집에 가서 가래떡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오면 하락한 쌀값으로 인해 가래떡으로 장난을 칠 업자도 사라졌다.

솔직히 말해 이런 편리함을 생각하면 옛날이 결코 그립지 않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설날 아침에 먹는 떡국이 마치 추운 겨울에 배달되어 온 불어 터진 짜장면 같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혹시 고수레떡만을 상품으로 내놓는 떡집이나 식품회사는 없을까. 낮은 천장과 층간소음 때문에 집에서 떡메를 칠 수는 없지 않은가. 혹시 있다면 고수레떡을 사서 전자레인지에 녹인 다음, 온 식구가 모여서 가래떡을 만들고 싶다. 아이들도 스스로 만든 가래떡을 넣고 끓인 떡국을 먹으면 세뱃돈만큼 한 살 먹는 일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지지 않을까. 내년 설날에는 떡국을 이렇게 만들자고 온 식구가 함께 새해 다짐을 했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민속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