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세상을 바꿉니다]<1부>나는 동네북이 아닙니다도 넘은 직장내 언어폭력
“지잡대 나온 XX가…”
○ 나를 병들게 한 상사
지난해 팀을 옮긴 이후 회사는 ‘지옥’이 됐다. 전 팀에선 ‘일 잘하는 막내’라는 평가를 받았다. 새로 옮긴 팀 과장은 직원들에게 막말을 퍼붓는 걸로 유명했다. 업무에 미처 적응 못한 막내는 곧바로 표적이 됐다. 작은 실수에도 “왜 하필 저런 ××가 들어와서” “아, 왜 그걸 못해”라는 핀잔이 날아왔다. 처음엔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다. 오후 7시쯤이던 퇴근 시간도 오후 9∼10시로 늦췄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어느 날 말대답을 했다가 동료들 앞에서 “어디서 지잡대(지방 대학을 낮춰 부르는 말) 나온 ××가…”라는 말을 들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그때쯤이었다. 손떨림과 불면증이 시작된 것은.
취재팀은 직장인 20명에게 △상사의 막말을 듣는 빈도 △가장 상처가 된 상사의 말 △최소한 하지 말아야 할 말 △상사의 막말로 인해 겪게 된 증상을 들어봤다. 욕설이나 면박, 비꼬기 등 폭언을 ‘하루 한두 번은 듣는다’는 응답이 6명으로 가장 많았다. 2명은 매일 수없이 듣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 중 심장 두근거림, 불면증, 손떨림 등 신체적인 증상을 호소하는 이는 4명이었다. 다른 응답자들도 “웃고 떠들다가도 상사를 보면 무표정이 된다” “입술을 꽉 깨문다” “휴대전화 소리에 깜짝깜짝 놀란다” 등의 변화를 호소했다. 2012년 연세대 원주의대 예방의학과 장세진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직장 내 폭력 유형 중 언어폭력은 55.5%를 차지했다. 전체 응답자 중 “언어폭력 경험이 있다”고 답한 직장인은 2010년 3.7%에서 2011년 4.9%로 늘었다.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언어폭력 피해 직장인 중에는 ‘외상후울분장애(PTED·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며 “좌절과 굴욕감에서 시작돼 심한 경우 신체적 통증을 유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 사무실 안 숨죽이는 여직원
중소기업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김모 씨(27)는 수수한 옷차림으로 회사에 다녔다. 같은 팀 남자 상사는 “입술(립스틱)이라도 좀 바르고 다니지?” “○○ 씨는 다리가 날씬해서 치마가 예쁠 것 같은데” 등 김 씨의 옷차림을 지적했다. 김 씨는 “기분이 나빠도 막상 대들었을 때 상사가 부인하면 끝이다”며 “오히려 고발하는 여직원들을 보고 ‘별나다’는 둥 뒷말을 하는 경우가 많아 속을 털어놓을 수도 없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민우회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노동상담실의 총 상담 건수 394건 중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은 222건으로 56.35%를 차지했다. 한국여성민우회 이소희 활동가는 “이런 발언들은 여직원들을 동등한 자격으로 입사한 동료라기보다 한 명의 여성으로만 바라보는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모진수 인턴기자 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