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산에 눈꽃 피네… 숫눈 밟으면 발밑 개구리 울음소리
태백산=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햇살 그리워 실눈 뜨고
하늘 향한 그리움 지울 수 없어
속내 녹아내리는 아픔
구멍 난 허리춤에 시린 바람 불 때마다
정지된 세월에 지쳐 몸 기울고
한 때는 먼 별 찾아
위로 올라갈수록 아득한 허공
이제 보니 몸이 낮아질수록
하늘이 더욱 가깝구나
…………
둥근 돌 하나 머리에 이고
또 다른 천년은 박제된 세월아래 눕고 싶다
―김정호 ‘주목나무’에서
태백산 주목군락지. 산에 산에 눈꽃 피었네. 하얀 이불 뒤집어 쓰셨네. ‘소리 내지 말고/눈물 흘리지 말고/한 사흘만 설산처럼 눕고 싶다//걸어온 길/돌아보지 말고/걸어갈 길/생각할 것도 없이/무릎 꿇을 것도 없이/흰 옷 입고 흰 눈썹으로’(문정희 ‘설산에 가서’ 부분) 태백산=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한 발 한 발 무심하게 걷는다. 사위가 쥐죽은 듯 적막하다. 봉우리는 아득하다. 헉헉! 하얀 입김이 뭉툭뭉툭 똬리를 튼 채 가뭇없이 허공으로 사라진다. 껑충 큰 이깔나무들이 하얀 눈꽃을 다발로 피운 채 서있다. 눈 이불 뒤집어쓴 졸참나무, 물박달나무, 고로쇠나무, 생강나무, 층층나무, 가래나무, 물푸레나무…. 바람이 맵차다. 나무들이 진저리를 친다. 눈꽃들이 우수수! 흩날린다. 호르르 호잇! 갑자기 새들이 듣그럽다.
김화성 전문기자
조선시대 화가 이인상(1710∼1760)은 1735년 겨울, 사흘 동안 눈 쌓인 태백산에 오른 뒤 말했다. “태백산은 작은 흙이 쌓여 크게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차차 높아져서 100리에 이른다. 결코 그 공덕을 드러내지 않으니, 마치 대인의 덕을 지닌 것과 같구나.”
겨울 태백산은 누구나 오를 수 있다. 암소 잔등처럼 완만하다. 사길령매표소, 유일사매표소, 백단사매표소, 당골 광장, 어디에서 시작하는 코스도 5∼6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오르는 데 2∼3시간, 내려오는 데 2시간여. 보통 유일사 쪽에서 올라가 당골 쪽으로 내려간다. 유일사 코스는 8분 능선부근이 평평한 언덕 즉 평전(平田)이다. 봄엔 철쭉꽃이 장관이다. 겨울엔 눈꽃이 황홀하다. 8분 능선까지 오르는 데 ‘깔딱 고개’ 같은 것은 없다. 초중반이 약간 가파를 뿐이다. 더구나 출발지점 유일사주차장이 이미 해발 890m다. 꼭대기 장군봉(1567m)까지 이미 반쯤은 오른 것이다. 정확히 677m만 더 올라가면 된다. 아이젠과 스틱은 필수장비. 신발 속으로 파고드는 눈과 정강이의 찬 기운을 막아주는 스패츠도 물론이다. 신발은 발목 끈을 다시 한번 꽉 조여야 한다. 능선 칼바람도 만만치 않다. 얼굴마스크나 이중장갑(속·겉장갑)을 갖추는 게 좋다.
요즘 태백산은 눈이 적다. 영하 10도 이하의 꽁꽁 얼어붙는 날씨도 예년에 비해 드물다. 상고대(Air Hoar) 보기가 쉽지 않다. 아쉽다. ‘강원산간지역 대설주의보’는 언제쯤 발효될까. 영동엔 눈이 많이 내렸다는데 영서는 왜 눈이 적을까. 요즘 겨울 산꾼들은 발을 동동대며 애를 태운다.
상고대는 눈과 강추위가 만들어내는 눈꽃의 절정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물방울이 얼어붙은 ‘얼음꽃’이다. 겨울나무의 사리 ‘눈물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태백산 8분 능선의 철쭉, 분비나무, 주목, 잣나무에 핀다. 앉은뱅이 철쭉무리에 얼음꼬마전구가 덕지덕지 매달린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수정처럼 빛난다.
태백산 보호주목은 모두 3928그루이다. 설악산, 덕유산, 소백산 주목보다 잘생겼다. 붉은 근육질몸매가 탄탄하다. 붉은 열매, 붉은 껍질에 늘 푸른 뾰족 바늘잎. 그 사이로 주렁주렁 피운 하얀 얼음꽃. 몽환적이다. 태백산 능선 나뭇가지들은 겨우내 상고대를 피우며 ‘얼었다 녹았다’를 되풀이한다. 살은 얼고 피부는 트다 못해 얼어터진다. 그래도 얼음꽃을 피우고 또 피운다.
태백산 정상에 서면 함백산(1573m), 금대봉(1418m), 은대봉(1442m), 두타산(1353m), 매봉산(1303m), 구룡산(1345m), 면산(1245m), 백병산(1259m), 응봉산(998m) 등 우뚝우뚝한 봉우리들이 휘뚜루마뚜루 빙 에둘러 서 있다.
내려가는 길은 천제단(천왕단)에서 당골 코스를 택한다. 생각보다 가팔라 미끄럽다. 아이들은 임시 비닐봉지썰매를 타고 깔깔대며 내려간다. 여성들은 넘어질세라 가슴이 조마조마 엉금엉금 내딛는다. 남자들은 그래도 제법 균형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두둑 두두둑!” 문득 간밤에 얼었던 눈 더미를 밟는다. 댕강! 눈 허리가 발밑에서 으스러지는가 했더니 쫘악∼ 미끄럼을 탄다. 아이쿠! 넉장거리로 나뒹군다. 하늘에 별 부스러기들이 어지럽게 날린다. 엉치뼈가 시큰하다. 푸하하! 아늑하다. 강같이 평화롭다. 그래, 내가 살아있구나!
‘홀로의 술잔에 조금 취했던 것도 아니다/투명한 대낮 늘 다니던 골목길에서 뜻도 없이/와르르! 하늘을 한쪽으로 밀치며/화형식 불꽃 속의 허깨비처럼 고꾸라졌다/빨간 피 시멘트에 후두둑 쏟아지는데/네, 네에 잘 알겠습니다/오체투지 그대로 땅에 엎어져/눈물나고 평화로워라/온 생애가 일시에 가뿐할 뿐이다’ (문정희 ‘낙상’에서)
▼ 한반도 백두대간의 허리… 신라시대부터 제사 올려 ▼
태백산 천제단
‘민간신앙의 성지’ 태백산 천제단.
왜 태백산 정상부근엔 천제단이 3곳이나 이어져 있을까. 그것은 천제단이 서민들의 자발적 기도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태백산천제단에선 천신 즉 단군과 산신을 아울러 모셨다. 불교국가 고려 땐 태백산신령을 주로 모셨다. 유교국가 조선전기엔 산신도 빠지고, ‘천왕(天王)’을 모셨다. ‘신(神)’이 ‘왕(王)’으로 격하된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년)이후 다시 ‘천신(天神)’으로 직위가 올라갔다. 나라가 바람 앞 등불 같은 신세가 되자, 단군할아버지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제사를 맡은 제관(祭官)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태백산천제단은 신라 땐 왕, 고려 땐 국가가 파견한 관리가 주도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엔 그 지방의 구실아치나 백성들이 주가 되어 제사를 지냈다.
술과 과일 등을 놓고 천제단에 절하는 사람들.
이에 비해 강화도 참성단은 국가의 공식 제천의례장소였다. 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줄곧 국가 관리들이 제사를 맡았다. 각종 제사비용을 위해 별도의 땅 즉 ‘제전(祭田)’까지 내려 줄 정도였다.
태백산은 한반도 등뼈인 백두대간의 허리다. 허리뼈가 곧추서야 똑바로 걸을 수 있다. 참성단이 있는 강화도 마니산은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지점이다. ‘한반도의 명치’다. 명치가 막히면 기가 막혀 살 수 없다. 두 곳 모두 ‘한민족의 혈처’인 것이다.
■Travel Info
▽삼수동 태백순두부 033-553-8484 ▽토속한정식 너와집 033-553-9922 ▽태백산가는 길 한식 033-554-1600 ▽한국관생등심 033-554-3205 ▽미락 돌솥밥 불고기 033-552-2855 ▽태백 김서방네 닭갈비 033-553-6378
▼숙박 콘도형(취사 가능) 태백산민박촌, 15동 73실 규모, 033-553-7460
♣태백시청문화관광과 033-550-2081 태백산도립공원 033-550-2741 태백역 033-552-7788 태백시외버스터미널 033-552-3100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