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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新 명인열전]제주 수중생태계 렌즈에 담는 김병일씨

입력 | 2014-02-07 03:00:00

8827회 스쿠버다이빙… ‘영원한 문섬지기’




조류는 다소 세지만 바닷속을 유영하기에 불편은 없다. 수온은 15도, 시야는 7∼8m로 다소 흐리다. 겨울 한기는 참을 만하다. 온몸으로 자유를 느낀다. 노랑, 보라, 빨강으로 치장한 연산호는 보고 또 봐도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2일 오전 서귀포항 앞 문섬 주변에서 스쿠버다이빙을 위해 제주를 찾은 일본인 2명을 안내한 김병일 씨(56·태평양다이빙스쿨 대표·사진). 김 씨는 이날 현재 8827회의 스쿠버다이빙을 기록했다. 국내 스쿠버다이빙업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기록이며 해외에서도 드물다. 그는 1987년 처음 서귀포 문섬 주변에서 다이빙을 시작한 이후 꼬박꼬박 ‘로그 북’을 작성했다. 로그 북은 스쿠버다이빙을 할 때 수온을 비롯해 스쿠버다이빙 수심 및 시간, 소감 등을 적은 다이빙 일기다. 연간 300∼500회나 바닷속을 누볐고 어느 해에는 365일 가운데 270일가량을 바다에 나가 539회를 기록하기도 했다. 풍랑주의보, 폭풍주의보, 태풍 등으로 배가 뜨지 못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바다로 ‘출근’한 것이다.

“바다는 운명처럼 다가왔습니다. 거대한 자석에 끌린 듯 문섬 수중에 찰싹 붙어 버렸습니다. 매일매일 숨 가쁘게 변하는 수중 생물을 들여다보다 보니 여기까지 와 버렸어요.”

스쿠버다이빙 횟수가 모든 것은 아니다. 스쿠버다이버라기보다는 수중 사진 작가, 수중 생태 전문가라는 이름이 더욱 어울린다. 국내 내로라하는 수중 해양학자들은 서귀포에 오면 대부분 그의 안내를 받는다. 문섬 주변 수중은 새로운 생물이 끊임없이 나타날 정도로 연구의 보고. ‘문섬지기’로 소문난 김 씨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제주 주변 해양 조사는 물론이고 독도, 이어도 수중 탐사에 그가 빠지지 않았고 방송다큐멘터리 제작에도 수없이 참여했다.

김병일 씨가 제주 서귀포시 문섬 주변 바닷속에서 아열대 어종인 육동가리돔을 배경으로 유영하고 있다. 국내 최고 스쿠버다이빙 기록을 갖고 있는 그는 “알기 쉬운 수중 생물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다”고 말했다. 김병일 씨 제공

대구가 고향인 김 씨가 제주에 정착한 것은 1991년. 안정된 직업이던 국방부 군무원을 접고 무작정 내려왔다. 2년 뒤에는 태평양다이빙스쿨을 인수하고 직접 운영에 나섰다. 그는 “서귀포의 아늑하고 평온한 풍경이 눈에 어른거렸다.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고 난 뒤 휴가 때마다 문섬을 찾았다. 나풀거리는 연산호, 무리지어 나타난 자리돔, 거대한 방어 무리 등이 마치 여기에 살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운명적이라는 말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하면서 당시 군무원 월급의 10배가량인 수중카메라를 구입했다. 이후 수중카메라에 투자한 돈만도 1억 원이 넘었다. 깊이 있는 사진을 위해 뒤늦게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기도 했다. 소장한 수중 사진이 5만 장을 넘는다. 1999년에는 일본 마린수중조형센터가 주최한 세계 최고 권위의 ‘수중사진공모전’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수상이 줄을 이었다. 공모전 참가는 후배들의 몫으로 넘겨줬지만 그의 손에는 카메라가 여전히 들려 있다. 비록 지금은 아니더라도 훗날 문섬 생태계를 보여 주는 수중 역사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2007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30여 년 동안 연산호를 연구하는 학자를 안내한 적이 있어요. 문섬 수중을 살펴보고 난 후 ‘이처럼 다양한 연산호가 폭넓게 밀집한 곳은 세계에서 이곳뿐’이라며 극찬했어요. 그런데 정작 제주에서는 덜 소중하게 여기는 느낌이에요.”

연산호는 1년에 불과 2∼3cm 정도 자란다고 알려졌지만 그의 관찰 결과 1년에 수십 cm씩 자라는 것으로 밝혀졌다. 조류가 셀 때 플랑크톤을 먹기 위해 분홍수지맨드라미, 큰수지맨드라미, 가시수지맨드라미 등의 연산호가 활짝 피어나고 문섬 주변으로 빠르게 서식지를 넓히고 있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김 씨는 “여러 학자와 동행해 조사를 하면서 해양 생물 관련 책이 일반인이 보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연산호, 해면생물, 아열대 물고기 등의 생태를 누구나 알기 쉽게 풀어 쓴 책을 내고 싶다. 우리 바닷속에도 소중하고 희귀한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몇 년 전 그는 문섬 옆 무인도인 섶섬 주변에서 무늬오징어의 산란 장면을 찍기 위해 10여 일 동안 매일 찾아간 적이 있다. 무늬오징어 무리 옆에서 살그머니 손을 내밀자, 다이버의 물거품(버블) 소리만 들려도 저만치 달아날 정도로 예민한 무늬오징어 한 마리가 손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마치 영화 ‘ET’에서 외계인과 소년이 손가락을 마주 대는 장면처럼 순간 전기에 닿은 듯, 소름 돋는 감동이 온몸에 전해졌다. 이런 수중 생물과의 ‘교감’은 그를 또다시 바다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