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두 갑오년 1894년과 2014년…그리고 한반도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녹두장군 전봉준. 동아일보 DB
관군은 동학군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동학군이 매번 한발 빨랐다. 초토사 홍계훈은 전주성안의 감영병사와 한양에서 데리고 온 경군(800여 명) 등을 이끌고 금구·태인(5월 22일)→정읍(23일)→고창(24일)→영광(25일)→장성(27일)으로 동학군을 뒤쫓는 데만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홍계훈 선발대(300여 명)는 장성황룡촌 싸움(5월 27일)에서 동학군에게 무너졌다. 대포와 기관총도 빼앗겼다.
전봉준은 이미 전주성이 비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남행하던 동학군이 돌연 북쪽으로 방향을 튼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5월 29일 동학군은 바람처럼 전주성 턱밑인 금구·원평에 닿았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헌옷과 짚신을 신고 피란민에 섞여 달아났다. 그는 이미 파면된 상태였다. 후임 김학진(5월 12일 제수)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
전봉준은 전주성만 생각했지 성밖의 전략적 요충지 확보에 실패했다. 동학군은 성안의 낮은 곳에서 산봉우리로 공격하자니 희생자가 속출했다. 전봉준도 왼쪽 허벅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동학군 내부가 술렁였다. '전봉준을 묶어서 홍계훈에게 바치고 목숨을 빌자'는 모의가 드러날 정도였다. 외부와 고립되어 식량도 떨어져갔다. 반면 관군은 날로 그 수가 불었다. 징발군과 지원군이 속속 합류했다.
이 즈음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이 도착해 홍계훈에게 '동학군에게 퇴로를 열어주고 조속히 전주성을 되찾으라'고 촉구했다. 이미 조선 땅에 청병(8일)과 일본군(9일)이 상륙한 상황에서 두 나라 군대를 조선에서 철병시키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결국 6월 10일 동학군과 홍계훈 사이에 전주화약(和約)이 맺어졌다. 홍계훈은 소수의 병력만 전주에 남기고 부리나케 대부분의 경군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갔다. 일본군이 넘보고 있는 서울의 안위가 더 급했던 것이다.
일본의 정치공작은 치밀하고 집요했다. 전주성 함락 사흘 뒤인 6월 3일, 일본영사관 순사 와타나베는 운현궁에 있던 대원군을 찾아가 그의 생각을 물었다. 이에 대원군은 "동학당이 아니라 백성들이 지방관의 폭정에 견디지 못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쉽사리 진정되기 어려우며 서울에서도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이번 일에는 비범한 인물도 가담하고 있어 그 책략에 놀랄 만한 것이 많다"고 말했다. '비범한 인물'이란 식객으로 그의 집을 드나들었던 전봉준을 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9월 9일에는 일본 시찰원(낭인) 다케다가 전주감영에 있던 전봉준을 찾아가 마음을 떠보았다. '서울로 쳐들어가 아예 이씨왕조를 뒤엎을 생각은 없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이에 전봉준은 "신자(臣子)의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실행한다면 대의와 명분은 어찌되겠느냐"며 그를 질책하고 물리쳤다. 전봉준은 자신이 체포된 이후에도 일본으로부터 수차례 '일본에 협조하면 살려준다'는 회유를 당했다. 전봉준은 그때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후 김개남은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7월 27일 김개남은 백마를 타고, 군사 3000명과 함께 남원성에 입성했다. 당시까지 전라도지역에서 남원, 운봉, 나주(전봉준, 나주목사 민종렬과 담판했지만 실패)의 관리와 양반유생들은 집강소설치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김개남은 이용헌 남원부사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그리고 인근 금산, 무주, 진안, 장수, 용담, 임실, 순창, 구례, 곡성, 담양을 총괄하는 대접주로서 위세를 떨쳤다. 8월 2일 전봉준은 남원에 들어가 김개남을 다독였다. 그 후 김개남은 잠시 강경노선을 누그러뜨렸지만 그때뿐이었다. 전봉준은 후에 재판 심문에서 "(김개남이) 하나도 말을 듣지 않으므로 끝내는 절교에 가까운 상태였다"고 말했다.
전봉준은 전주화약 이후 신중했다. 전라도일대에 설치된 집강소를 돌며 전주화약의 실행여부를 점검했다. 부하들에겐 '경군이나 청군이 추격하더라도 절대 싸우지 말고 시기를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조선정부도 각국에 '조선내란은 이미 진정됐다'고 알렸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내란은 아직 진행 중이며 이를 청일 양국이 공동으로 신속하게 진압하자'고 제안했다. 뭐든 빌미를 삼아 일본군의 조선주둔을 합리화하려는 의도였다. 청나라는 '조선내란이 진정됐으므로 이제 두 나라는 철군을 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사건이 터졌다. 전봉준은 "마땅히 목숨을 걸고 달려가야 할 것이나, 저들 오랑캐의 예봉이 심히 날카로워 지금 우리가 나가 싸운다면 그 화가 종묘사직에 미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어쩌면 일본이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꼭두각시로 내세운 대원군을 의식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봉준은 체포된 후 재판 심문과정에서 '대원군과의 내응, 밀약설, 사주 여부'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어느 정도 '호감'을 가졌거나 '교감'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둘 다 서로가 필요했다. 대원군은 '민중의 힘'이 필요했고, 전봉준은 대원군의 정치적 지지가 필요했다. '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1894년 갑오개혁이후 약 4개월간(7월 23일~11월 18일) 국정을 섭정했다. 비록 허수아비였지만 집권 직후 내린 교지에 '保國安民(보국안민)'이란 표현을 썼다. 이는 동학군의 요구사항에 대한 화답성격이 짙다.
10월 10일, 결국 전봉준은 2차 봉기를 결정했다. 일본의 핍박에 나라가 바람 앞 등불 같았다. 마침 가을걷이도 끝나가면서 농민군들이 한숨을 돌리던 시기였다. 그때 저잣거리엔 "가보세(갑오세)! 가보세(갑오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리!"라는 참요가 떠돌았다. '갑오년(1894년)에 미적거려 을미년(1895년), 병신년(1896년)이 되면 일을 크게 그르친다'는 뜻이다.
김화성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