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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이 먼저 발포했다고? 日軍 경복궁 점령 왜곡 전모

입력 | 2014-02-07 11:21:00

[특집] 두 갑오년 1894년과 2014년…그리고 한반도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된 원색 판화첩 ‘우키요에'에 실린 ‘조선경성 오토리공사대원군 호위’라는 제목의 그림. 동학군 진압을 구실로 파견된 일본군이 오토리 공사 지휘아래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불법 난입하는 장면이다. 천안박물관 제공

일본 해군이 서해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기 이틀 전인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조선 왕궁인 경복궁을 기습 점령했다. 이 사건에 대해 일본은 경복궁과 그 주변에 있던 조선 군대가 먼저 발포해 일본군이 어쩔 수 없이 응전하고 왕궁으로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침략 의도가 없었다는 공식 견해를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경복궁 점령 사건이 생긴 100년 뒤인 1994년 일본 후쿠시마(福島) 현립 도서관인 사토문고에서 청일전쟁 관련 귀중한 사료가 발견됐다. 옛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만든 '일청전사(日淸戰史)' 초안의 일부였다. 이전까지 단편적인 기록만 있어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관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일청전사 초안에 따르면 청일전쟁의 구실을 찾던 일본은 조선 정부에 청나라를 쫓아내 달라는 공식 문서를 보내라고 압박한다.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일본 공사는 7월 20일 조선에 주둔 중이던 제5사단 혼성여단에 경복궁을 포위할 것을 제안한다. 일본군은 22일 밤 집결지에서 야영하며 때를 기다리다 23일 오전 0시 30분 '계획대로 실행하라'는 오토리 공사의 전보가 도착하자 경복궁 서쪽 영추문을 도끼로 부수고 진입해 총격전 끝에 오전 7시 반경 점령했다.

이는 우발적인 충돌이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고종을 사실상 포로로 삼고, 왕비 일족과 대립하고 있던 대원군을 내세워 친일 정권을 수립해 조선 정부를 일본에 종속시키고 청나라 군대를 조선 밖으로 몰아내려고 사전에 치밀하게 짠 각본에 따라 경복궁을 점령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공식적으로 펴낸 청일전쟁 전사인 '메이지 27, 28년 일청전사'(1904년 1권 간행)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와 거의 같은 내용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일청전사 초안을 찾아낸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나라여자대 명예교수는 "역사를 왜곡한 사실이, 다름 아닌 일본 육군참모본부의 초안을 통해 입증됐다"며 "역사의 진실은 결코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듬해 10월 8일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 영사관원, 경찰 등은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고종의 왕비)를 시해했다.

일본 정부와 군이 조직적으로 역사를 왜곡해 온 탓에 위조를 위조라고 자각하지 못하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 일본에는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 관련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일본인의 자긍심을 잃게 하는 '자학사관'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푸른역사가 발간한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는 일청전사 초안을 토대로 나카츠카 교수가 쓴 글(박맹수 옮김)이다.

김상철 전문기자 sckim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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