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말 한마디]발레리나 김주원
발레리나 김주원 (성신여대 교수)
햇빛이 창가에 스며들어 나를 비추면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조명 같았고, 쓸쓸히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의 달빛은 공연이 끝난 후 나를 비추는 커튼콜의 핀 라이트 같았다.
1992년 개방된 지 얼마 안 된 보수적인 러시아. 그것도 자존심 센 러시아 최고의 발레학교 안에서 소수의 동양인이었던 나는 수많은 ‘싸움’을 이겨내야 했기 때문에 사춘기는 누구보다 늦었다. 그 ‘싸움’에 사춘기가 헤집고 들어올 여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형광펜을 집어 들어 밑줄을 긋고 가슴속에 새겼다. 어렸던 때라 당시엔 그 말을 단순히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연습만이 기량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풀이했다. 당시 외로움과의 싸움에서 내가 기댈 것이라곤 연습밖에 없었다. 어쩌면 더 지독한 연습을 위해 그 문장이 찾아왔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가 궁금할 때가 있기도 했다. 그것들이 발레리나로서의 나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막연히 다른 사람들의 삶을 부러워하며 아직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에 아쉬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럴 때면 다른 길에 대한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몽유병 환자처럼 꿈속에서 여러 곳을 이리저리 헤매다 깨어보면, 여느 때처럼 토슈즈를 만지고 리허설에 몰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곤 했다. 아마도 발레리나로서 리허설을 통해 배우는 것들이 가장 나다운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발레는 리허설이다, 이 말이 앞으로도 수많은 리허설을 해야 할 나를 얼마나 발전시킬지 아직 상상하기 힘들다. 또한 아직도 그 문장을 100%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15년의 짧은 시간 동안 배우고 느끼게 했던 그것이 이제는 홀로 서게 된 내게 또 다른 깨달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것들이 발레리나, 무용가, 인간 그리고 ‘여자 김주원’을 더욱 무르익게 만들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기 위해 내일도 리허설을 할 것이다. 앞으로 쌓아 나아갈 경험과 인생의 깨달음을 위해 더욱 깊은 곳으로 나를 끌고 갈 것이다. 언젠가 ‘발레와 리허설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