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바오로 2세, 1984년 성인 103위 시성식 집전 1984년 한국을 찾은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한국 순교자 성인 103위 시성식을 집전하는 모습. 동아일보DB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9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시복된 순교자들은 대부분 신해박해(179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의 천주교 초기 신자들이다. 이들 중에는 해외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파견되기 전부터 가톨릭 신앙을 지킨 인물들이 포함돼 있으며,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빼면 평신자들이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첫 성직자였다. 고베아 주교가 파견한 주 신부는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1794년 입국했다. 그는 6년 만에 조선교회 신자 수를 1만 명으로 늘리는 데 공로를 세웠다. 신유박해 때 중국으로 피하려다 순교하기로 마음먹고 자수한 뒤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새남터에서 효수형에 처해졌다.
정약종은 형 정약전에게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에 입교했다.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2권을 집필해 주 신부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보급했고 평신도 단체 ‘명도회’ 초대 회장을 지내다 1801년 순교했다. 이성례는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자 별도의 시복 절차 중에 있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이다. 투옥 후 남편이 순교하자 죽어가는 젖먹이 막내를 살리기 위해 배교(背敎)를 위장해 석방됐다. 하지만 장남 최양업이 중국에 유학 중인 신학생인 사실이 드러나 다시 수감된 후 지금의 당고개에서 참수됐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이성례를 테마로 조성한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 1984년 성인 103위 시성식 집전 1984년 한국을 찾은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한국 순교자 성인 103위 시성식을 집전하는 모습. 동아일보DB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는 9일 발표문에서 “1984년 시성식 이후 아직 시복시성이 되지 않은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필요성이 제기됐다”며 “그런 염원이 시성 30주년인 올해 시복의 열매를 맺게 됐다”고 밝혔다.
30년 전 103위 시성은 초기 한국에 선교사를 많이 파견한 파리외방선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이번엔 한국 가톨릭교회의 힘으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별위원회에 소속된 한 신부에 따르면 미국 이민 1.5세대인 정시몬 신부가 시복 청원서의 번역과 연구, 정리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로마 한인 신학원 원장인 김종수 신부도 현지에서 ‘로마 청원인’ 자격으로 시복과 관련한 행정적인 업무를 원활하게 처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