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돼 있던 대흥안령의 훌른보이르 초원의 현재 모습. 물가에서 말과 양 떼가 방목되고 있다. 윤석하 사진작가 제공
윤명철 교수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이전의 고구려. 장수왕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최대 제국으로 성장시키려면 통일이 가장 큰 과제였다. 우선 장수왕은 주변국에 대한 정비를 끝냈다. 국제관계를 안정시켰으니 본격적으로 통일 정책을 추진했다.
첫 단계는 영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정치적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장수왕은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해양봉쇄 작전을 폈다. 백제와 신라가 중국 남북조와 교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를 폄하하는 국서를 북위에 보낸 바 있다. 475년 고구려의 3만 대군이 백제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고구려군은 계속 남진했다. 평택만을 장악했고 금강을 넘었다. 대전의 월평산성을 포함해 이 일대에는 이 무렵 고구려가 쌓은 성이 적지 않다.
장수왕이 이어 추진한 것은 종족의 통일이었다. 지금은 우리 민족과 거리가 멀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만주 일대에는 고구려 방계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북부여 유민들이 세운 두막루국이 대표적이다. 몇몇 사료(史料)를 비교하면 부여와 선비계인 실위, 거란과 같은 계통인 해와 고막해는 서로 말이 통했고 생활풍습도 비슷했다. 북만주와 동만주 강 일대에 거주하는 물길(숙신 읍루 말갈 여진 만주족으로 명칭이 변한다)도 그런 종족 중 하나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이 종족들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다. 하지만 큰 틀로 볼 필요가 있다. 그 종족들은 우리 민족과 혈연공동체 언어공동체 역사공동체다. ‘남’이 아니란 얘기다.
이런 종족들이 어울려 사는 고구려는 요즘 말로 다문화 체제였다. 고구려 영토에는 논농사 농경지, 밭농사 농경지, 대초원, 건조지대, 삼림, 해양이 혼재돼 있었다. 쉽게 말해 농경민 유목민 사냥꾼 해양민이 어울려 독창적인 문화를 일군 것이다.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가 처음부터 자기들 역사이며 백제 신라와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다. 중국 문헌인 ‘후한서’에도 “고구려, 옥저, 예는 다 조선 땅에 있다”고 적혀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 첫머리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썼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 “신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故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貊皆檀君之壽也)”이라고 기술했다. 고주몽이 첫 번째로 벌인 정복사업에 대해 ‘삼국사기’는 “다물려어위복구토(多勿麗語謂復舊土)”라고 기록했다. ‘다물’은 고구려 말이며 옛 땅(구토)을 수복한다는 말이란 뜻이다. 이때 말하는 다물은 언어적 측면을 넘어 고구려의 국시이자 모든 것의 통일을 의미한다.
세종시 근처인 부강면 남성골산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금제귀걸이.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 박사 제공
아쉽게도 장수왕은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분열된 고조선 영토를 대체적으로 회복하고, 남북으로 흩어진 우리 민족과 방계 종족을 다시 흡수해 일원적 체계를 구축했다. 그 결과 고구려만의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중핵국가로 재정립(re-foundation)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윤명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