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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빙하기를 맞다

입력 | 2014-02-14 03:00:00


빙하기를 맞다
―조동범(1970∼ )

그녀의 가슴 위로 빙하기 지나간다
백화점 텅 빈 매장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득한 빙원의 골짜기를 떠올리고 있다
빙원을 떠돌다 모습을 드러낸
먼 과거의 죽음처럼
그녀는 선뜩한 고요에 담겨
죽음의 군락을 떠올리고 있다
쇼윈도 안의 그녀는
온몸으로 빙하기의 고요를 견디고 있다
백화점 텅 빈 매장에 앉아
어둡고 긴 빙하기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
백화점은 매일 밤 간빙기를 거쳐
빙하기의 끝을 향해 치닫는다
쇼윈도의 그녀는
결빙의 순간을 지나치며
대빙원의 아득한 깊이를 바라본다
그녀의 선득한 가슴 위로,
빙하기 지나간다


이 시가 실린 조동범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을 읽은 뒤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곳곳의 일상적 풍경에서 이제까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진상을 보게 될 것이다. 로드킬당한 동물, 동물원의 펭귄이나 북극여우, ‘단 한 번도 초원을’ 눈에도 담아보지 못하고 정육점에 걸린 네 발 동물들, ‘수컷 냄새 맡아본 적 없이 무정란 무수히 쏟아내던’ 폐계 등등. 마음 편히 살자고 짐짓 눈을 감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인간의 착취, 그리고 다른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에 대해 돌이켜보게 될 테다. 폐차된 자동차나 버려진 냉장고처럼, 한세월을 같이했던 사람의 손길에서 버려진 무기물에도 시인은 그 쇠멸감에 공명하며 통증을 느낀다. 이 시집이 특별한 것은 이 모든 잔혹 드라마를 묘사로 일관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시인은 한밤의 백화점을 들여다본다. 때는 겨울, 시인이 서 있는 바깥은 몹시 추울 것이다. 따뜻한 공기 속에서 은은한 음악소리 들으며 소비자와 판매자가 풍요로운 상품을 매개로 바삐 움직이던 백화점, 지금은 텅 비고 모든 움직임 그쳐 조용하다. 아마 공기도 냉랭할 테다. 인간은 사라지고 상품만 남은 세계를 ‘쇼윈도의 그녀’, 마네킹이 외로이 지킨다. 그 광경에서 시인은 지구 종말, 결국엔 인류 문명의 종말인 빙하기를 본다. 판매원들의 철야노동으로 밝혀진 밤의 도시, 야생을 빼앗긴 야생동물이 진열된 동물원, 그 모든 본성의 거대하고 총체적인 소외를 먹이로 공룡처럼 몸집을 키운 상품들의 만세왕국. 빙하기에는 바퀴벌레들만이 날래게 움직이리.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