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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대필’ 姜씨 22년만에 무죄… 누명 씌우고 벗긴 국과수 감정

입력 | 2014-02-14 03:00:00

1991년 “유서 글씨체-강기훈 필적 같다”
2007-13년 “김기설 노트와 유서 필체 동일”




1991년 5월 당시 한국사회 전체를 엄청난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던 ‘유서대필’ 사건은 13일 재심에서 강기훈 씨(50)에게 무죄가 선고되기까지 끝없는 논란을 불러왔다.

이 사건은 1991년 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 김기설 씨가 서울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하자 검찰이 조력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검찰은 숨진 김 씨가 어릴 때 여읜 생모에 대한 기억이 없음에도 유서가 “아버지, 어머니 어버이 날입니다”라는 글로 시작한 점 등을 들어 유서 대필 가능성을 제기했다. 검찰은 수사 끝에 강 씨가 반정부 투쟁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분신자살을 계획 중이던 동료 김 씨의 유서를 대신 작성해주면서 자살을 부추겼다는 혐의로 강 씨를 기소했다.

이 사건의 열쇠는 ‘유서를 누가 썼는가’를 판단할 강 씨와 김 씨의 필적이었다. 1991년 1심 재판부터 13일 재심 선고에 이르기까지 총 4번의 필적 감정이 있었지만 각 재판부는 서로 다른 판단을 내렸다. 1991년 1심 재판부는 “유서에 나온 글씨체가 강 씨의 필적과 같다”는 당시 국과수 감정 결과를 그대로 인정했다. 반면 변호인 측 감정인인 일본인 필적 감정가가 내놓은 정반대의 결과에 대해선 감정인이 한글을 전혀 모르는 점 등을 들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5년 김 씨의 친구가 김 씨의 필적이 담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노트와 낙서장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제출하면서 사건은 새 국면을 맞았다. 위원회의 의뢰로 감정에 나선 국과수는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의 필체가 유서와 비슷하고 강 씨와는 다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강 씨는 이를 근거로 2008년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은 “1991년 당시 국과수 감정인 김형영 씨가 혼자서 대부분 감정해 놓고 법정에서 ‘4명이 함께 감정했다’고 허위 진술했다”며 재심을 결정했다.

지난해 재심 과정에서 검찰은 과거사위가 의뢰한 감정 결과를 믿을 수 없다며 국과수에 또다시 감정을 의뢰했지만, 국과수는 “낙서장과 노트에서 추출한 필체를 비교한 결과 동일인의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재심 재판부는 결국 강 씨의 손을 들어줬다.

검찰은 이번 사건을 특별사건으로 분류하고 재심에 공을 들였다. 과거 중앙정보부나 국가안전기획부, 경찰이 수사한 사건이 아니라 서울지검 강력부가 직접 수사해 기소했던 사건이기 때문. 이번 무죄 판결에 대해 검찰 내부에선 “대필을 뒷받침할 증거를 추가로 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고검 관계자는 “판결문 내용을 상세히 분석해 보고 대법원에 상고할지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 암투병 姜씨 “당시 검사들 유감 표명 해줬으면” ▼

무죄가 선고되는 순간, 방청석에선 탄성이 흘러나왔지만 강기훈 씨(사진)의 표정은 덤덤했다. 23년 전 김기설 씨 자살 방조 혐의를 받을 당시 건장한 청년이었던 그는 간암 투병으로 수척해진 중년이 됐다. 그는 재판 후 인터뷰에서 “오늘 판결은 1992년 대법원의 유죄 확정 판결 등이 잘못됐다고 밝힌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재판은 개인의 재판이 아니라 과거 사법부의 잘못을 밝히는 것이고 반성의 기회로 삼았어야 했는데 재판부가 아무런 유감의 표시를 하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당시 수사 관계자들에 대해 “(그들조차) 유죄를 확신하지 못했던 느낌과 뉘앙스를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을 잠시 떠올려서 어떤 형태라도 좋으니 유감의 뜻을 전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필적 감정자나 기관에 대해선 “필적 감정은 장난 같았다. 내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과학으로 따지는 것 자체가 웃겼다. 자신의 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생각하지 않는 전문가들은 ‘또 하나의 악’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신동진 shine@donga.com·최우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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