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이야기]<6>
고구려가 해양을 공략하던 당시 중심지 역할을 한 비사성이다. 황해와 발해 지역을 동시에 관측할 수 있다. 윤석하 사진작가 제공
윤명철 교수
고구려는 무기를 개발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말갈과 함께 거란을 끌어들였고, 적대국인 돌궐과도 제휴를 모색했다. 왜(일본)와는 담징 같은 승려들과 사신들을 파견해 대외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었다. 수나라에 우호적이었던 백제와 신라와는 전쟁 중이었다. 고구려의 온달장군은 신라를 공격하다 전사했다.
598년 수나라와의 70년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고구려는 말갈을 동원해 해륙 양면으로 선제공격에 들어갔다. 수나라가 30만 대군을 파견했지만 육군은 요서에서 패하고 수군(水軍)은 황해 북부에서 궤멸됐다. 3개월 전투에서 죽은 수나라 군사가 10명 중 8, 9명꼴이었으니 단연 고구려의 압승이었다.
612년, 113만3800명이라는 수나라 대군이 다시 쳐들어온다. 수천 척의 배가 출정했으며 800명을 태운 전함도 동원되었다. 수 양제는 고구려의 요동성(현 요양시)을 집중 공격했다. 당거(바퀴 달린 이동용 수레) 운제(높은 사다리)를 동원해 땅굴을 파기도 했다. 이때 벌어진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은 세계 전쟁 사상 단일 전쟁으로는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이 전쟁에서 요동성을 지킴으로써 방어에 성공한다. 민관 합일에 의한 단합의 힘이었다.
이때 등장한 영웅이 바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다. 그는 미리 살수(압록강설과 청천강설, 대양하설이 있다)에 군대를 매복해 두었다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의 전략으로 수나라 병사 30만 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병사는 겨우 2700여 명에 불과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패배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 되어 건국 30년 만에 망한다.
수나라를 계승한 나라가 바로 당나라다. 당 태종은 중국 역사상 최고 군주로 평가받는 정치가. 당 태종은 지난 수나라 때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라도 고구려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당나라는 수나라보다 강했다. 당나라에 겁을 먹은 고구려 일부 지배층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얻은 포로를 돌려보내고,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봉역도(일종의 고구려 지도)를 달라는 당 태종의 요청을 받아들여 넘겨주는 유화책을 편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를 바로잡은 이가 바로 연개소문이다. 그는 642년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뒤 당나라에 굴복하려는 내부의 ‘적’들을 제거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마침내 고구려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 연개소문과 당 태종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밀고 밀리는 ‘고구려-당’ 전쟁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종족을 모두 참여시켜 승리하지만 665년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내분으로 망한다.
중국은 “고구려는 중국 역사이고 중국의 지방정권이기 때문에 고구려와 수·당이 벌인 전쟁은 (중국의) 국내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이게 바로 동북공정의 주장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벌인 전쟁은 겉으로는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가 맹주였지만 거란, 말갈, 토욕혼, 돌궐 백제 신라 왜까지 얽혀 동아시아의 종주권과 교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운명을 건 국제전이었으며 여기서 당당히 승리한 우리 역사이다.
다음은 고구려와 삼국통일 전쟁 이야기입니다.
윤명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