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효환(1967∼ )
봄나무 아래에서 가을을 심었다
움트는 산수유나무 아래
꽃샘추위 들고 난 자리에
단풍나무 몇 그루 심은 오후
마른 풀 더미 물어 날라
전봇대 작은 구멍에 둥지를 튼
곤줄박이 한 마리 부산하다
그날 밤 때 아닌 큰 눈이 내리다
초봄의 대설주의보,
발목까지 무릎까지 푹푹
둔촌성당을 지나 한산초등학교 운동장을,
일자산을 뒤덮은 백색의 칼끝은
늦은 밤, 내 명치 끝을 겨누고 차오른다
작은 박새의 둥지는
나의 순정은
때 이른 사랑이었는가 보다
이 눈 그치면
연둣빛 감도는 노란 꽃을 피워서 개나리보다 앞서 봄을 알리는 산수유나무, 이제 막 움틀 뿐인데 화자는 그 아래에 나무를 심는다. 꽃샘추위가 유난히 잦고 길었나 보다. 그러다 날이 확 풀리자, 이제 겨울이 다 지나갔거니 했을 테다. ‘마른 풀 더미 물어 날라/전봇대 작은 구멍에 둥지를 튼/곤줄박이 한 마리’도 부산하다. 아름다운 가을을 보자고 단풍나무를 심는 화자나 번식의 계절이 다가옴을 감지한 곤줄박이나, 들뜬 마음에 몸이 들썩거린다. 아, 그러나 ‘그날 밤 때 아닌 큰 눈이’ 내린다. 화자나 곤줄박이나 세상모르고 어수룩했던 게 아니다. 폭설이 ‘때 아니게’ 내린 것이다. 삶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예기치 못한 위험에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화자는 그 ‘백색의 칼끝’이 명치끝을 겨누는 듯하다. 아직 뿌리 내리지 못한 ‘어린 봄나무의 숨결’이며 ‘작은 박새(곤줄박이)의 둥지’며 ‘나의 순정’이며, 다 ‘때 이른 사랑’이었던가! 어떤 사람에 대한 순정이건 삶에 대한 순정이건, 화자는 순정의 사람이다. 이웃으로 곤줄박이가 사는 줄 모르는 도시인이 얼마나 많은가. 화자의 순정어린 눈은 그걸 놓치지 않는다. ‘이 눈 그치면’…, 완연 봄이리! 설었었던 사랑의 싹들, 꼿꼿이 되살아나리!
캐나다 이주민인 내 친구는 그곳에서 공원 뜰을 가꾸는 일을 자원봉사로 하고 있다. 지난겨울, 그가 돌보는 정원을 거닐다가 쌓인 눈 사이로 뾰족뾰족 싹을 내민 화초를 사진 찍어 보내줬다. ‘누가 조금 잘해주면 곧장 사랑에 빠지는, 속없는 여자 같지?’ 잠깐 따뜻했을 뿐인데 싹을 내미는 한겨울 화초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배어나는 사진설명이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