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얀 자작나무들 우우우 맨살 종아리로 눈비탈에 서다
강원인제읍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 4만여 그루나 되는 ‘순백의 정령’들이 가녀린 팔을 푸른 하늘에 쭉쭉 뻗고 있다. 북풍한설 칼바람에도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꿋꿋하게 견딘다. 맨살 종아리가 안쓰럽다. 가녀린 흰 목덜미가 애틋하다. 마치 산비탈에 하얀 생선 잔가시로 촘촘히 박혀 있는 ‘빼빼로 숲’ 같다. 겨울 자작나무여! 너만이 진정 갈매나무처럼 정갈하고 단호하구나! 인제 원대리=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정끝별 ‘자작나무 내 인생’ 전문>
겨울자작나무는 ‘순백의 정령’이다. ‘하얗고 긴 종아리가 슬픈 여자(최창균 시인)’다. 뽀얀 우윳빛 살결이 우아하다. 기품 있고 정갈하다. 북풍한설 산비탈에 하얀 잔가시로 촘촘하게 박혀있다. 맨살 종아리가 안쓰럽다. 가녀린 흰 목덜미가 애틋하다.
자작나무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꿋꿋하게 칼바람을 견딘다. 시베리아 눈표범 무늬의 하얀 ‘빼빼로 숲’이다. 흰 몸엔 검버섯 칼자국이 무수하다. 숲 속에선 커엉! 컹! 늑대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만주벌판의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여진·말갈·거란족 추장의 거친 고함소리도 엇갈린다. 그렇다. ‘겨울(자작)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고은 시인).’
강원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오붓하고 아늑하다. 가까이서 스킨십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눈밭의 ‘숲 속 작은 나라’다. 25ha(약 7만5000여 평)에 4만여 그루가 빽빽하다.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눈꽃이 바람에 하늘하늘 춤을 춘다. 자작나무 숲 위로 새파란 하늘이 덩그마니 걸려있다. 돌을 던지면 금방이라도 쨍그렁! 깨질 것 같다. 상큼한 자작나무 향기가 싱그럽다. 머릿속이 박하처럼 맑아진다. 바로 ‘자일리톨 껌’ 향기다. 1코스 0.9km, 2코스 1.5km, 3코스 1.1km. 뽀드득! 눈밭을 밟으며 느릿느릿 소걸음으로 걷는 맛이 그만이다. 매끈한 자작나무 몸을 만져보면 단단하면서도 촉촉하다.
인제군 남면 수산리 자작나무숲은 널찍하다. 멀리서 봐야 새뜻하다. 제지회사 동해펄프(현 무림P&P)가 10년 동안(1986∼1995년) 600ha(181만5000평, 응봉산 12골짜기) 땅에 180만여 그루를 심었다. 현재 100여만 그루가 살아남았다. 길게는 25년, 짧게는 16년 정도 나이를 먹었다. 큰 것이 밑동 지름 20cm, 키 15m쯤 된다.
수산리에서 6.7km쯤 가면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선 발아래 한반도 모양의 자작나무 숲을 볼 수 있다. 햇살이 언뜻언뜻 구름 사이로 내비치면 자작나무 뽀얀 살결아래 푸른 실핏줄이 보일 만큼 더욱 투명하다. 우듬지 잔가시에 걸러진 햇살이 고슬고슬 눈부시다. 푸른 잣나무, 황갈색 낙엽송, 하얀 자작나무의 어우러짐도 볼만하다.
수산리 자작나무 숲은 트레킹코스로 으뜸이다. 수산리∼어론리 19km 임도코스도 5, 6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먹고 마실 것은 준비해야 한다. 임도는 해발 450∼580m에 걸쳐 있다. 대체로 평탄하지만 눈밭길이라 아이젠과 스틱은 기본이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옛 소련의 솔제니친은 ‘1950년 말 위암말기로 죽을 뻔했는데 차가버섯을 먹고 극복했다’고 말했다. 차가버섯은 자작나무의 수액을 빨아먹고 산다. 무려 15∼20년 동안 자란다. 두께가 10cm가 넘어야 하며, 15년 이하는 약효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러시아에서는 오래 전부터 민간약용버섯으로 쓰였다.
솔제니친은 90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한국의 자작나무 숲에는 차가버섯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날씨가 맞지 않거나, 나무가 아직 오래되지 않아 그럴 것’이다. 일본에선 자작나무가 이에 좋다며 이쑤시개로 많이 쓴다.
‘저 도시를 활보하는 인간들을 뽑아내고/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한다면/자작나무의 눈을 닮고/자작나무의 귀를 닮은/아이를 낳으리//봄이 오면 이마 위로/새순 소록소록 돋고/가을이면 겨드랑이 아래로/가랑잎 우수수 지리’
(안도현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에서)
▼ 신라인은 어떻게 자작나무껍질을 구했을까 ▼
1500여 년의 비밀 ‘천마총 천마도’
눈을 흠뻑 뒤집어 쓴 삿갓모양의 자작나무집. 안에 들어가면 자일리톨 향기가 박하처럼 맑다.
옛 개마고원 사람들은 자작나무로 움막을 짓고, 자작나무 장작으로 밥을 지었다. 그리고 그 나무로 불을 때 온돌방을 덥혔다.
밤중엔 자작나무 횃불로 길을 밝혔다. 산삼을 캐면 자작나무 껍질에 싸서 보관했다. 그리고 숨을 거두면 자작나무 껍질에 싸서 땅에 묻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명함을 내민다. 시베리아 사람들은 자작나무 집에서 태어나 살다가 그곳에서 죽는다. 자작나무에서 자라는 차가버섯 차를 마시고 자작나무로 페치카를 달군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 그러다가 죽으면 자작나무 껍질 옷을 입고 묻힌다. 알타이무당들은 자작나무 껍질로 ‘하늘의 별을 담는 주머니’를 만들었다.
자작나무는 북위 45도 위쪽 추운지방에서 잘 자란다. 기름기가 많아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 우리나라 백두산 개마고원일대(북위 42도)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는 대부분 사스레나무이다. 껍질이 매끈하지 않고 약간 거칠다. 약간 구불구불하게 자란다.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자작나무 껍질 위에 그려진 ‘천마도(天馬圖)’가 발굴됐다. 말안장에 깔아 ‘흙 튀김 방지’에 쓰이는 장니(障泥·가로 75cm 세로 53cm)에 ‘혀를 빼어 물고 하늘을 나는 말’ 그림을 그렸다. 그림판은 자작나무 껍질을 무려 47겹이나 덧붙였다. 임금의 모자인 듯한 ‘세모꼴 자작나무껍질 모자’도 함께 있었다.
경주는 북위 35.8도에 불과하다. 아예 자작나무가 자랄 수 없다.
도대체 5∼6세기(추정) 경주에서 자작나무 껍질을 어디서 구했을까. 어떻게 1500여 년 동안이나 썩지 않았을까. 그 무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Travel Info
▼교통
♣수산리(인제군 남면 수산리 산 46-1번지)
▽승용차=서울양양고속도로→동홍천나들목→44번 국도(인제방면)→신남 삼거리(좌회전)→46번 국도(양구방면)→1.5km→수산리입구(좌회전), 어론리는 신남을 지나 44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어론 SK주유소를 끼고 좌회전 ▽버스=동서울∼인제행 신남하차(2시간 소요), 서울 상봉동∼인제행 신남하차(2시간 소요), 신남→수산리행 버스 오전 7시 35분(1회뿐), 신남→어론리 버스(오전 6시 55분부터 1시간 간격)
♣원대리(인제읍 원대리 산 763-4번지) ▽승용차=서울춘천고속도로→동홍천나들목 교차로→속초인제방면→남전교 직전 우회전→인제종합장묘센터 표지판 지나 원대리 산림초소 ▽버스=동서울이나 서울 상봉동∼인제하차, 인제에서 원대리행 버스
▼먹을거리
♣신남, 수산리 ▽고려관, 우리한우마을(033-461-0704) ▽대흥식당, 붕어찜 매운탕(033-461-2599) ▽세월낚기, 붕어찜 매운탕(033-461-1196) ▽하늘마당, 매운탕(033-463-0705) ▽절골송어양식장(033-462-6446) ▽정원식당, 두부전골(033-461-5080)
♣원대리 ▽원대막국수(033-462-1515) ▽원대식당, 막국수 두부전골 토종닭(033-462-3976) ▽피아시, 매운탕 추어탕(033-462-3334) ▽내린천 가람식당, 삼겹살 매운탕 토종닭(033-461-6283)
▼숙박
♣수산리 ▽마을민박 심성흠 이장(033-461-6517, 010-6376-4777) ♣캠핑장 ▽인제자연학교(010-6376-4777 cafe.naver.com/injaecamping) ▽자작나무 캠핑장(010-7130-9537, cafe.daum.net/jajakcamp)
♣안내=인제국유림관리소 033-460-8036 인제군청 산림녹지과 033-460-2071 문화관광과 033-460-2082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