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1호를 만나다]<5>인터컨티넨탈호텔 김연선 상무
김연선 상무는 “프런트데스크를 지키던 말단직원 시절, ‘인터컨티넨탈호텔 최초의 한국인 총지배인이 되고싶다’는 말을 거침없이 했는데 정말 꿈을 이뤘다”며 환하게 웃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김 상무는 한마디로 자신의 성공에 대해 “꿈같은 일”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높고 화려한 자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어릴 때에는 이름 대신 언년이(계집아이라는 속어)로 불렸을 정도였다. “가난했고 배운 것도 없었다”는 그녀가 서울을 대표하는 호텔의 총지배인이 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소설감이라 여겨질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그녀가 태어난 달은 5월이었다. 하지만 동네 훈장이었던 할아버지는 손녀의 출생신고를 한없이 미뤘다. 그의 친정어머니가 애원을 해도 “계집애를 무슨…”이라며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 시절 딸들이라면 엄마를 대신해 새벽 밥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밤낮으로 삯바느질을 하는 엄마를 도와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하던 일곱 살 때부터 연탄불에 밥을 짓기 시작했다.
나를 키운 힘은 8할이 ‘결핍’
아들들 공부시키기도 빠듯한 형편이었다. 중3 때는 학급 반장까지 맡았지만 아버지는 “계집애가 무슨 공부냐”고 반대했다. 엄마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고등학교에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고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한 형편에 대학은 언감생심. 아버지는 취직을 하라고 했다. 그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대학 예비고사를 치렀다. 그리고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2년제 전문대 전자계산학과를 택했다. 장학금을 받았으니 대학 진학을 반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첫마디는 이랬다. “차비며 밥값은 돈 아니냐?” 그녀는 주말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 학교를 마쳤다. 하지만 허전했다.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여전히 목이 말랐다.
그는 영어를 선택했다. 학원에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아도 주한미군 방송을 들으면 되지 않는가. 취업도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다. 밤낮으로 공부했다. 마침내 작은 결실을 맺었다. 여행사와 무역회사를 다니다 나중에는 미8군 내 교육센터에서 일하게 됐다. 1980년대만 해도 부러움을 받던 직장이었다.
호텔에서 평생직장을 꿈꾸다
“GRO를 ‘지하(地下)로’로 들었어요. 순간 내가 영어를 잘하는데 지하에서 일할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에 면접관에게 강하게 얘기했죠. 프런트데스크로 가고 싶습니다. 하하하.”
일은 쉽지 않았다. 하루에 8, 9시간을 서 있어야 했다. 체크인 고객들을 응대하고 체크아웃 정산을 했다. 동료 18명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고 유일하게 호텔 근무 경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힘들다고 징징거리지도 않았고, 1원의 계산도 틀리지 않았다. 삿대질을 하는 손님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도 없었다. 몇 달 후 상사가 “너처럼 독한 애는 처음 봤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3년 뒤 그는 객실부장 비서로 발령받았다. GRO에서 매니저(주임)가 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엔 실망했다. 하지만 이내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객실부장은 로비와 프런트, GRO 등을 총괄하고 예산까지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그 밑에 있으니 호텔 업무 전반을 배울 수 있었다. VIP 전용공간인 클럽라운지를 직접 기획하는 행운까지 누렸다. 이어 입사 6년 만에 클럽라운지를 담당하는 GRO 매니저가 됐다.
“클럽라운지를 만들 때 정말 열심히 했어요. 구두 굽을 매일 새로 갈아야 할 정도로 뛰어다녔으니까요. 새 카펫, 새 가구 때문에 알레르기가 생겨 얼굴에 화장도 못할 정도로 피부가 나빠졌어요. 그래도 신이 났어요.”
승진 누락으로 겪은 슬럼프
‘영원한 에너자이저’일 것 같은 그녀에게도 슬럼프가 왔다. 입사 10년 차, 대리 승진에서 미끄러진 직후였다. 주위에서는 “될 거다”란 말을 해주었는데 막상 인사 뚜껑이 열리고 나니 남자 동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상실감은 컸다. 전문대 졸이라는 학벌 탓일까, 아니면 여자인 탓일까. 이런 상황이라면 미래가 없는 것 아닌가,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쉴 새 없이 달려온 인생의 전환기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포기 대신 ‘공부’였다. 그녀는 초심으로 돌아갔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으며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국내 대학원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99년엔 교육 매니저 발령을 받았다. 그녀가 일하고 있던 그랜드 인터컨티넨탈(테헤란로) 인근에 새로 문을 여는 인터컨티넨탈 코엑스(봉은사로)의 신입사원을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신입 직원 300명을 6명씩 그룹으로 나눠 서비스 교육을 시키는 데 두 달 만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탈진이 됐다.
열정은 확실히 보상받기 마련인가.
2004년 마침내 그는 인터컨티넨탈 코엑스의 객실팀장이 됐다. 국내 특급호텔에서 여성이 객실 총책임자가 된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영국 인터컨티넨탈호텔스그룹(IHG)이 운영권을 갖고 있어 주요 보직은 모두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호텔경영학 박사학위도 그 무렵 땄다.
병마 이기고 현장 최고책임자로
긍정에너지로 앞만 보고 달려온 그녀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2006년 유방암 1기 진단을 받은 것.
“멍했죠. 울진 않았어요. 전 잘 안 울거든요.”
그녀는 수술대에 오르면서도 “예쁘게 꿰매 달라”고 농을 던졌다고 한다. 하지만 항암치료 기간이 길어지면서 긍정 에너지도 바닥을 보였다.
“서너 달이면 복귀할 줄 알았는데, 회복이 생각보다 더뎠어요. 자리를 오래 비우는 부담이 커져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죠.”
하지만 회사는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그녀가 병을 완치하고 돌아오자 코엑스점보다 규모가 큰 그랜드점 객실팀장을 맡겼다. 그리고 5년 뒤인 2013년 10월 ‘최초의 한국인 총지배인’이자 여성 1호 총지배인이 됐다.
“총지배인은 객실·식음·조리를 모두 통솔하는 현장의 최고 지휘자라고 할 수 있지요. 신입 직원 한 명 한 명을 제 손으로 키웠는데 이제 이들과 함께 호텔 전 직원 500여 명이 혼연일체가 돼 ‘집처럼 편안한 호텔’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겁니다.”
가난과 여성이라는 차별, 거기에 병마까지 이겨낸 그녀와의 인터뷰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그것은 어느 한 분야에서 한눈팔지 않고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여유처럼 보였다.
▽약력
― 1988년 호텔 인터컨티넨탈 서울 입사
― 1994년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GRO 매니저
― 1999년 인터컨티넨탈 코엑스 서울 교육 매니저
― 2004년 인터컨티넨탈 코엑스 서울 객실팀장
― 2005년 경기대 호텔경영학 박사 졸업
― 2008년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객실팀장
― 2013년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 총지배인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