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만에 남북 이산상봉]이산가족들 속초서 잠 못 이룬 밤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하루 앞둔 19일 김섬경 씨(91)가 이동식 침대에 누운 채 강원 속초시 상봉자 집결지로 들어오고 있다. 그는 최근 감기 증세로 쓰러질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지만 북측의 아들과 딸을 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김 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유중근 대한적십자사 총재. 속초=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속초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이산가족은 북한의 손자(30)를 만나는 백관수 씨(91)였다. 인천에 사는 백 씨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오전 10시 반 속초에 도착했다. 큰 가방 속에는 손자에게 선물할 내복과 의약품, 화장품이 빼곡히 챙겨져 있었다. 백 씨는 아들과의 상봉을 원했지만 이미 세상에 없었다. 백 씨는 “나만 한국에서 편하게 산 것 같아 손자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손자가 원망하는 눈으로 날 볼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10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남긴 유언장을 갖고 온 이산가족도 있었다. 황해도 옹진 출신의 김명복 씨(66)는 누나와 고모에게 아버지의 유언장을 보여줄 생각이다. 아버지는 유언장에 “내가 죽더라도 꼭 누나를 찾으라”고 남겼다.
구급차를 타고 온 김섬경 씨(91)가 링거를 매단 이동식 침대에 누운 채 숙소에 들어서자 주변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터졌다. 18일 속초에 도착한 김 씨는 감기 증세로 쓰러졌지만 “북한의 아들과 딸을 꼭 만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김 씨는 수액 링거를 단 채 금강산으로 향할 예정이다. 이날 격려차 이산가족들을 찾은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의료진에게 “김 씨를 특별히 잘 돌봐 달라”고 당부했다.
상봉 기회가 주어진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돼 대신 참가한 아들 이봉자 씨(59)의 사연은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 씨의 어머니 김정자 씨(90)는 북에 두고 온 딸 이영자 씨(71)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겨우내 병세가 나빠져 요양원을 나설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어머니 대신 누나를 만나는 이 씨는 “어머니가 평생을 그리워하셨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해 자식으로서 너무 가슴 아프다. 지난해에만 상봉이 이뤄졌더라도 가실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 씨는 누나에게 줄 선물 보따리에 어머니 사진을 여러 장 넣었다.
한국 측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83명) 중 이근수 씨(84)가 상봉 행사 바로 전날인 이날 건강 문제로 막내 여동생과의 만남을 결국 포기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함경남도 출신인 이 씨는 북한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돼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됐고 반공포로로 풀려난 뒤 한국군에 입대해 중위로 제대한 이력이 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속초=이인모 기자 / 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