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만에 남북 이산상봉]
“살아는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사진으로만 만나는 동생 1972년 납북된 김석만 씨의 누나 김양자 씨가 20일 부산 연제구 연산동의 한 암자에서 동생의 사진을 들고 있다. 부산=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문경식 씨
○ “그저 생사라도 알았으면…”
종갓집의 2대 독자였던 김석만 씨는 어선 안영36호의 기관장으로 일했던 고종사촌 박봉만 씨의 권유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함께 납북됐다. 어머니 박삼이 씨는 일제강점기 홋카이도(北海道) 탄광에 끌려갔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옹기그릇 장사를 하며 겨우 생계를 꾸렸다. 김양자 씨는 “아들과 생이별한 뒤 어머니는 화병으로 10년 동안 병원 신세를 지다가 세상을 떠났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 돈을 빌려서라도 동생을 고등학교에 진학시켰어야 했는데….”
아직도 동생이 납북될 때 살았던 군산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는 잘 나온 동생 사진조차 제대로 없는 게 늘 가슴 아프다. 막내아들을 잃은 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회를 다니던 어머니가 성경책에 고이 간직해온 동생의 사진은 어머니의 눈물로 얼룩져 있다. 어머니는 그렇게 늦둥이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1985년 79세로 눈을 감았다.
○ “납북자 가족의 상처를 보듬을 때 됐다”
납북자 이산가족의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 못한 데에는 한국 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다. 김양자 씨는 “동생이 납북되고 나서 사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와서 이것저것 캐물었다”며 “그토록 알고 싶은 동생의 생사는 말해주지 않으면서 집에 누가 왔다 가면 꼬치꼬치 캐묻곤 했다”고 말했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