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장도 없던 피겨 불모지에서 세계 정상으로 날아오른 기적 끓는 혼을 피워낸 피날레 마법 피겨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 준 그대를, 이제는 보낸다
2000년대 세계 여자 피겨는 ‘여왕’ 김연아(24)의 시대였다. 김연아가 2010년 밴쿠버 대회 쇼트프로그램에서 기록한 78.50점과 프리스케이팅 점수 150.06, 합계 점수 228.56점은 4년이 지난 요즘도 여전히 세계 신기록이다.
김연아의 경쟁자는 자신뿐이었다. 2009년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는 합계 점수 207.71점을 기록하며 여자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200점을 돌파했다. 이후 자신의 기록을 여러 차례 넘긴 것을 포함해 세계 기록을 11차례나 경신했다.
김연아가 펼친 기술들은 전 세계 피겨 선수들의 기준이 됐다. ‘점프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김연아의 점프는 러시아, 미국 등에서 어린 선수들을 위한 교본이 됐다. 심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국제심판 세미나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선수가 바로 김연아다. 한 국제심판은 “언젠가 심판들이 모여 김연아의 점프를 만점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결론 낸 적이 있다”고 전했다.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는 게 쉽지는 않았다. 피겨 강국들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보이지 않게 김연아를 견제했다. 국제 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석연찮은 판정을 받아온 것도 그런 이유다. 2008년 11월 중국에서 열린 그랑프리 시리즈에서 김연아는 완벽한 점프를 뛰었지만 심판들은 두 개의 점프에 이상이 있다고 지적했다. 2009년 12월 일본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김연아는 편파 판정 탓에 기권까지 생각했다.
밴쿠버 올림픽 때는 김연아가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메달 색깔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럴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김연아는 무결점 연기를 펼쳐야 했다. 그리고 김연아는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를 통해 자신의 완벽을 증명했다.
한국 피겨스케이팅은 김연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김연아가 나타난 이후 피겨는 한국의 국민 스포츠가 됐다. 온 국민의 김연아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지금도 인근 빙상장에 가면 ‘제2의 김연아’를 꿈꾸며 얼음판을 지치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모두 김연아가 바꿔 놓은 풍경이다.
피겨스케이팅만이 아니다. 비인기 종목 선수에게 “어떤 선수가 되고 싶은가요”라고 물으면 많은 선수들은 “김연아 같은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나이, 성별, 종목과 관계없다. 한국 사이클의 전설인 조호성(40·서울시청)은 언젠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보다 16세 어린 김연아를 롤 모델로 꼽았다. 그는 “피겨스케이팅처럼 사이클이 국민들에게 힘을 주고,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도록 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 꿈을 향해 조호성은 불혹을 넘긴 요즘도 페달을 밟고 있다.
○ 용기와 희망의 아이콘
대한민국에서 김연아 같은 선수가 나온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김연아는 마음 놓고 훈련할 빙상장이 없어 하루에도 2∼3곳을 돌아다니며 훈련을 해야 했다. 그나마 낮은 일반 대관 시간이라 훈련을 하려면 새벽이나 밤늦은 시간에 해야 했다.
열악한 환경을 이겨낸 것은 타고난 신체와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한창 건강할 10대 중반부터 김연아는 발과 허리, 등에 부상을 안고 살았다. 너무 많은 점프를 하느라 특히 오른발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른 발등 부상으로 예정됐던 그랑프리 시리즈에도 나가지 못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김연아는 단순히 한 명의 운동선수가 아니다. 김연아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피겨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 피겨의 꽃을 피운 김연아를 보면서 국민들은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 밤늦은 시간까지 TV 앞에 모여앉아 김연아를 응원하는 것은 그를 통해 무한한 기쁨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은 그 하이라이트였다. 그해 2월 26일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프리스케이팅에 나선 김연아는 관객은 물론 심판들까지 매료시켰다. 연기가 끝난 직후 그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시상대 위에 올라 애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그는 다시 끝없는 눈물을 흘렸다. TV를 지켜보던 국민들도 함께 웃다가 울었다.
그런 김연아가 이제 스케이트화를 벗는다. 마지막 올림픽의 메달 색깔은 이미 중요한 게 아니다. 김연아가 우리 국민들에게 준 기쁨과 행복은 그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김연아와 동시대를 살아서 행복했다”고. 안녕 김연아, 고마웠다 김연아.
소치=이헌재 uni@donga.com / 김동욱 기자
※프리스케이팅 경기 결과는 dongA.com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