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 논설위원
김일성은 1912년, 박정희는 1917년생이다. 김일성이 태어난 지 100년을 눈앞에 둔 2011년 12월 아들 김정일이 절대 권력의 삶을 마감하고 손자 김정은이 3대 세습을 시작했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 이듬해인 2018년 2월에는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퇴임한다. 북한은 왕조적 권력승계, 남한은 국민의 직접선거이긴 하지만 우연 치고 묘한 우연이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유산은 현재진행형이다.
정치적 출발은 김일성이 훨씬 유리했다. 항일투쟁 경력을 지닌 그는 1945년 스탈린의 힘을 업고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최고 권력자가 됐다. 1961년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일본군 초급장교 전력(前歷) 때문에 명분에서 밀렸다. 1960년대 초는 경제력도 북한이 남한을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요즘 국제사회에서 김일성 일족의 통치를 긍정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북한의 요덕수용소는 나치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능가하는 극심한 인권탄압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3대 수령’이 저지른 반(反)인도적 범죄를 규탄했다. 수많은 주민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폭압정치로 죽는데도 김일성 왕족들은 초호화판 생활을 즐기며 수십억 달러의 비자금을 해외로 빼돌렸다.
미국 하버드대 명예교수 에즈라 보걸은 “박정희는 국가를 위해 몸을 던진 리더였으며 그때 기회를 놓쳤다면 한국의 산업화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중국전문가 윌리엄 오버홀트도 “한국의 오늘은 박정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면서 덩샤오핑이 추진한 중국의 근대화 전략은 ‘박정희 모델’을 모방했다고 단언한다. 두 사람은 과거 박정희를 비판했던 학자들이다. 박정희 시대를 체험한 한국인 중에도 젊은 시절 그를 미워했다가 공과(功過) 평가의 중심을 크게 옮긴 사람이 많다.
박정희가 아니라도 한국 경제가 지금처럼 발전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국내외 세상 흐름을 너무 모르는 유치한 인식이라고 보지만 그것까지는 생각의 자유라고 치자. 하지만 박정희에게는 온갖 저주와 악담을 퍼부으면서 경제 복지 자유 인권 언론 등 모든 측면에서 퇴출 0순위인 김일성 왕조의 폭정에 침묵하거나 한술 더 떠 비호하는 일부 세력의 위험한 행태만은 용납하기 어렵다. 법원이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린 이석기류(類)의 집단이 대표적이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백년전쟁’도 막바지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우리 사회가 집단 자멸의 길만 택하지 않는다면 승부는 사실상 판가름 났다. ‘박정희의 나라’가 남긴 긍정적 유산을 이어받고 취약점을 보완한 뒤 ‘김일성의 나라’에서 지옥을 경험한 북한 동포와 힘을 합쳐 통일한국의 대장정을 시작하는 그날은 언제쯤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