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토요판 커버스토리]내려올때도 아름다워라

입력 | 2014-02-22 03:00:00

[연아를 보내며]




‘피겨의 전설’ 김연아는 17년 동안 빙판 위에서 피겨스케이팅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김연아는 자신의 이번 연기를 “100점 만점에 120점”이라고 평가했다. 소치=변영욱 기자 cut@donga.com·뉴시스

2014 소치 겨울올림픽에서 김연아(24)는 금메달을 목에 걸지는 못했다. 하지만 결코 김연아가 못해서가 아니다. ‘러시아 전체’와의 힘겨운 대결의 결과였다. 김연아의 연기를 지켜본 5000만 국민과 전 세계 피겨 팬들은 안다. 오직 김연아만이 피겨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줬다는 것을. 그리고 수많은 시상대 위에서 당신이 흘렸던 눈물은 그 어떤 금메달보다 더 빛이 났다는 것을.

○ “춤을 잘 출 것 같은데 그렇지 않네요.”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기자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여인은 분명 김연아였다. 2009년 11월 ‘스케이트 아메리카’가 열린 미국 레이크플래시드 시내의 한 클럽에서였다. 대회가 끝나면 선수를 비롯한 관계자들은 뱅킷(Banquet·연회)을 가진다. 대개의 경우 기자들은 참석 대상이 아니지만 그날은 운이 좋게 외국 스태프의 초청을 받아 입장할 수 있었다. 갑자기 음악 소리가 커졌다. 댄스타임! 기자를 알아본 김연아가 말을 건넸다. “같이 춰요.” 막춤이나마 30분 정도 몸을 흔들며 김연아와 함께했다. 굳이 김연아의 춤 실력을 공개하자면 클럽에 있던 어떤 사람보다도 최고였다.

기자는 2007년부터 김연아의 종목인 피겨스케이팅을 담당했다. 밴쿠버 겨울올림픽과 여러 차례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했다. ‘압도적인 세계 1위’ 김연아를 취재할 수 있었던 것은 기자로서 큰 행운이었다. 이번 소치 겨울올림픽을 끝으로 김연아는 빙판을 떠난다. 기자가 지켜본 ‘피겨 전설’ 김연아를 그가 사용했던 프로그램 곡들과 함께 되돌아본다.  

▼ “어떻게 생활해요?” 물으니 “숙녀의 생활은 비밀입니다” ▼

○ Gold―정상에 서다(2008∼2009시즌 갈라프로그램·최선을 다해 목표에 다다른다는 뮤지컬 ‘카미유 클로델’의 OST)


“가장 좋았던 경기요? 당연히 첫 월드 챔피언이 됐던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 그리고 제가 그토록 원했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요.”

김연아는 세계선수권에서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미셸 콴(미국)을 처음 만났다. 훈련 링크에서 콴을 만난 김연아는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연아는 콴과 짧은 만남 뒤 상기된 표정으로 “너무 떨려 말도 제대로 못했다”고 웃었다.

김연아가 우승을 차지하며 대회가 끝난 뒤 메달을 딴 선수들을 상대로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에서 민망한 상황이 펼쳐졌다. 시상식 뒤 30분이 지나도 김연아가 기자회견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 김연아의 지각 이유는 몰려드는 팬들의 사인 공세 때문이었다. “기자회견장으로 가려고 했는데 명색이 1위를 차지한 선수가 사인을 안 해 줄 수는 없잖아요. 팬들에게 모두 사인을 해주다 보니 시간이 늦었어요. 월드 챔피언인데 이 정도는 해야죠.”

○ 눈보라―시련을 딛다(2004∼2005시즌 쇼트프로그램·게오르기 스비리도프가 시련 탓에 엇갈린 사랑을 다룬 푸시킨의 단편집을 기초로 작곡)

“엄마. 나 진짜 기권할까봐.”

김연아의 선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2006년 성인 무대에 데뷔한 이후 김연아는 고질적인 허리와 엉덩관절(고관절) 부상에 시달렸다. 2007년 1월 창춘 겨울아시아경기대회와 2008년 2월 4대륙선수권대회 출전을 부상으로 포기했다.

2008년 3월 스웨덴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도 다리 엉덩관절 부상으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부상은 심각했다. 점프할 때마다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다. 지켜보던 어머니 박미희 씨(현 올댓스포츠 대표이사)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김연아는 대회 기간 진통제를 맞으며 버텼다.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항상 미소를 띠는 모습에 아픈 선수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대회 결과는 동메달. 김연아는 “기적이다”고 말했다.

○ 오마주 투 코리아―완벽한 그녀(2010∼2011시즌 프리스케이팅·아리랑의 선율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음악을 편곡·김연아가 한국 팬에게 바치는 곡)

‘피겨의 전설’ 김연아는 17년 동안 빙판 위에서 피겨스케이팅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김연아는 자신의 이번 연기를 “100점 만점에 120점”이라고 평가했다. 소치=변영욱 기자 cut@donga.com·뉴시스

김연아에게는 많은 대회에 나설 때마다 확고한 목표가 하나 있다. 자신의 연기를 지켜볼 팬들 앞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김연아는 2008년 12월 경기 고양시에서 열리는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에 출전했다. 국내 팬들 앞에 서는 첫 국제무대였다. 부담은 생각보다 컸다.

3600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연아는 쇼트프로그램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1위를 기록했지만 김연아는 경기 뒤 한동안 라커룸에 틀어박혀 있었다.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 긴장도 풀어져 펑펑 울고 있었다. 김연아는 “한국에서 열린 대회라 더 잘하고 싶었는데 실수를 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시간이 흐른 뒤 당시 대회를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으로 국제대회를 한국에서 치렀어요. 부담감이 너무 커 대회가 끝나는 날이 올까 하고 두려웠어요. 이틀이라는 시간이 두 달처럼 느껴졌어요. 휴∼.”

○ Just a Girl―보통의 소녀(2007∼2008시즌 갈라프로그램·미국의 록밴드 노다우트가 부른 노래로 소녀의 장난스러운 매력이 돋보이는 가사가 특징)

“같이 식사할래요?” “네.” “네. 안녕!” “….”

미국 레이크플래시드에서 열린 그랑프리 5차 대회에서 ‘선수 김연아’가 아닌 ‘소녀 김연아’를 엿볼 수 있었다. 우연히 김연아와 같은 호텔에 묵게 된 것. 아침 식사 때마다 김연아를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한번은 같이 식사를 했다. 이때 김연아의 한 관계자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이제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김연아와 호칭 관계를 정리하라는 제안이었다. 김연아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꺼낸 말은 바로 “김 씨?”였다. 이어 “김 기자? 김 상? 김 오빠? 김 아저씨?”라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호칭을 쏟아냈다. 편하게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제안했더니 김연아는 ‘아저씨’가 더 낫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호칭 정리는 실패했다.

또 한번은 기사 마감 때문에 급하게 호텔로 가는 도중 차를 타고 식사를 하러 가는 김연아 일행과 마주쳤다. 김연아는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더니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라고 물었다. 순간 고민하다 “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김연아는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짓더니 사라졌다. 어리둥절했지만 나중에 김연아가 식사를 제안한 이유를 알았다. 식사를 못한 기자를 놀려주고 싶어 그랬다는 것을.

○ 제임스 본드 메들리―사생활은 “비밀”(2009∼2010시즌 쇼트프로그램·영국 비밀첩보원의 활약을 다룬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음악을 편집)

“인터넷? 그리고 인터넷? 또 인터넷?”

김연아의 사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2006년부터 약 5년간 훈련을 위해 캐나다와 미국에서 생활한 탓이 컸다. 김연아의 취미 생활은 알려진 대로 인터넷 서핑과 쇼핑이다.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김연아는 훈련 외에는 휴대용 컴퓨터 앞에서 거의 산다. 캐나다는 물론 국내에서도 마음 놓고 돌아다니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회가 열릴 때도 꼭 챙기는 것이 휴대용 컴퓨터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 오전 2시가 넘어서 잘 때도 많다. 인터넷 서핑 내용은 광범위하다. 인터넷 쇼핑몰에도 들어가고 자신에 대한 기사도 찾아본다. 김연아는 “나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 제목에 속아 클릭을 했다가 아무 내용도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할 때가 많다. 댓글은 좋은 내용도 있겠지만 그 반대를 보다 기분 나빠질까봐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통 어떻게 생활하느냐고 물으면 김연아는 이렇게 답한다. “훈련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어요. 그리고 숙녀의 생활은 비밀입니다.”

○ One Day I'll Fly Away―전설로 날다(2005∼2006시즌 갈라프로그램·영화 ‘물랑루즈’에 사용된 곡으로 희망을 노래하는 곡)


김연아는 2006년 국제무대에 데뷔한 이래 수많은 편파 판정에 실력으로 맞서왔다. 밴쿠버 올림픽을 바로 앞에 두고 김연아가 출전한 2009년 일본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김연아는 편파 판정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솔직히 편파 판정에 대해 화가 나지는 않아요. 겪을 만큼 겪어서 짜증만 나죠. 무덤덤하게 넘기려고 해요. 그냥 편파 판정이 시작되면 ‘또 시작이구나’ 생각해요.”

예전 김연아에게 물은 적이 있다. “대한민국이 아닌 미국이나 유럽에서 태어났으면 더 많은 우승과 편한 환경에서 운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연아는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분명히 그럴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어요.”

PS: 당신을 오랫동안 취재해서 그런가요? 지난해 태어난 제 딸이 당신과 생일(9월 5일)이 같답니다.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