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과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中칭다오 망명 생활 중 드러난 윤봉길 의사의 인간적 면모들
1931년 윤봉길 의사가 중국 칭다오에서 맏아들 종에게 쓴 편지.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 구구절절 가득하면서도 나폴레옹 에디슨을 언급하며 아버지가 없더라도 올바른 삶을 살 것을 당부하고 있다. 충남 예산군 충의사 소장. 보물 제568-12호. 문화재청 제공
아들은 조국산천 어머니의 근심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허나 “장구한 시일을 두고 과거사도 묵상했고 미래사도 암료(暗料·깊이 헤아리다)한” 결심을 어찌 바꾸겠는가. 이역만리 객지에서 피눈물을 쏟으면서도 스스로 택한 애국의 길을 의연히 걸어갔다.
1932년 4월 29일 일제 원흉들에게 폭탄을 던져 한민족 기개를 만방에 떨친 의사 매헌 윤봉길. 그에게 1931년 상하이로 가기 전 칭다오에서 1년은 그냥 흘려보낸 세월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를 다시금 다지고, 거리낌 없이 독립운동에 나서려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돈을 모아야 할 이유도 있었다. 마음을 무겁게 했던 빚을 탕감해야 했다. 훗날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에게 전한 자필 이력서를 보면, 세탁소 월급을 모아 ‘월진회(月進會)’ 자금 50원을 갚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윤 의사는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농촌 계몽 운동 조직인 월진회 활동을 벌였는데, 망명 당시 이 회비를 무단으로 가져왔던 것. 독립운동이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음에도 어떻게든 매조지 하는 의사의 맑은 성정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칭다오에서 윤 의사는 가족에게 편지 2통을 보냈다. 1930년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 뒤 이듬해 상하이로 떠나기 직전 맏아들 종(淙)에게 서신을 부쳤다. 의사는 “종아! 너는 아비가 없음이 아니다. 너의 아비가 이상의 열매를 따기 위해 잠시적 역행이지 하년(何年) 세월로 영구적 전전이 아니다”며 “후일에 따뜻한 악수와 따뜻한 키스로 만나자”고 다독였다.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가 쓴 ‘자유의 불꽃을 목숨으로 피운 윤봉길’(역사공간)엔 의사의 인정어린 면모도 드러난다. 칭다오에서 알고 지낸 한일진(韓一眞)이란 친구가 미국행을 결심하자 수중에 있던 돈을 털어 여비로 건넸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으나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다. 뒷날 한일진은 미국에서 의거 소식을 듣고 “평생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 싶다”며 의사의 고향집에 돈을 보냈다고 한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새로 찾아낸 1931년 판 ‘중국상공지도집성’. 맨 아래 세탁업 옆(동그라미 안)에 나카하라 세탁소 업소명이 보인다. 김광만 PD 제공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