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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에 민족혼 심어주던 교토 고려미술관 문닫을 위기

입력 | 2014-02-25 03:00:00

빠찡꼬 경영 정조문씨 사재로 설립… 국보급 50점 등 1700여점 전시
해외유일 한국문화유산 미술관… 아들 희두씨 “年 2억 운영비 벅차”




고려미술관 정희두 상임이사(왼쪽)와 학예연구원인 이수혜 씨가 고 정조문 씨의 기일을 하루 앞둔 21일 미술관 앞에 섰다. 교토=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21일 오후 일본 교토(京都) 히가시야마(東山) 구 야마토오(大和大) 거리의 한 골동품점 앞. 재일동포인 교토 고려미술관 정희두 상임이사(55)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가 멈춰 선 상점은 1955년 부친이자 고려미술관의 설립자인 고 정조문 씨(1918∼1989)가 당시 집 두 채 값인 200만 엔(현 환율로 약 2100만 원)을 주고 조선백자를 구입한 곳이다. 고려미술관의 출발이 된 장소인 셈이다. 이날은 부친의 25주기 기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정 이사는 요즘 마음이 무겁다. 빠찡꼬를 경영해 얻은 수익으로 고려미술관을 운영해왔지만 요즘은 1년 운영비(약 2억 원)를 대기도 벅차다. 일본 정부의 사행성오락 규제 등으로 빠찡꼬 사업이 활황이었던 1990년대 중반의 4분의 1로 줄었다. 그는 “미술관을 유지하기 위해 직원들은 파트타임으로 전환했고, 특별전시도 줄여야 할 형편”이라고 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었던 정조문 씨는 경북 예천군에서 태어나 6세에 일본으로 갔다.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 3년만 다닌 정 씨는 막노동과 가게 점원을 거쳐 빠찡꼬로 돈을 벌었다. ‘나는 왜 조선인으로 태어났을까’라고 한탄해왔던 그는 일본인들이 조선백자를 우러러보는 것을 보며 한민족으로서 자긍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故정조문씨

이후 그는 조선백자를 시작으로 우리 문화재를 모았다. 고려시대 석탑이 고베(神戶) 지역 논바닥에 부서져 뒹구는 것을 보고, 아무도 손을 못 대도록 논을 통째로 사들이기도 했다. 그 석탑은 지금 미술관 마당에 복원돼 서 있다. 이렇게 모은 불상 회화 조각을 비롯해 1700여 점으로 1988년 미술관을 열었다. 해외 유일의 한국 문화유산 테마 미술관이 탄생했다. 미술관에는 청자상감 모란무늬 편호(扁壺·한쪽 면이 평평한 항아리) 등 국보급이거나 이에 준하는 유물이 50여 점이나 있다.

정 씨의 취지에 감복한 일본 지식인들도 미술관 이사로 참여했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토대 명예교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 오사카(大阪)대 명예교수 등이다.

정 씨의 이 같은 사연은 국내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한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에 몸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1970년대 김일성 우상 숭배를 정면으로 비판했다는 이유로 총련과 멀어졌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군사정권 아래에 있던 남한과도 거리를 뒀다. 한번도 남북한을 찾지 않은 그는 이런 유언을 남기고 떠났다. “통일된 조국만이 온전한 내 조국이다. 통일될 때만 유물을 조국에 기증하라.”

정 씨의 외손녀로 고려미술관 학예연구원인 이수혜 씨(40)는 “미술관 이름도 통일국가였던 고려에서 따왔다. 통일에 대한 염원이 담겼다”고 했다.

오사카에서 만난 재일동포 문학계의 대부 김시종 시인(85)은 “고려미술관은 교토를 넘어 일본 전체 동포들에게 민족 정체성을 향한 등대와 같은 곳”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정 씨의 삶과 고려미술관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가제)로 제작될 예정이다. 황철민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는 19∼23일 도쿄, 교토, 쓰시마 섬 등을 돌며 정 씨의 과거 행적을 추적하고 지인과 가족을 인터뷰해 카메라에 담았다. 황 교수는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재일동포들의 노력을 조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교토=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