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호 군사전문기자
1990년대 초 서독 국방부의 심리전 총책임자를 지낸 오트뷘 부크벤더 박사. 그는 지난해 10월 연세대 특강에서 통독(統獨)의 실마리를 제공한 심리전의 효과를 이렇게 강조했다. 서독의 발전상과 체제 우월성을 접한 뒤 ‘속고 살았다’는 동독 주민들의 자각과 분노가 철옹성 같던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기적을 일으켰다는 얘기다.
당시 서독군의 대(對)동독 심리전은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서독 군 당국은 통일 직전까지 갖은 수단과 방법을 활용한 심리전으로 동독을 흔들었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대형 풍선을 이용한 전단 살포와 확성기 방송이었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무차별적 심리전이다. 이를 통해 공산주의 정권의 선전 선동에 가렸던 동독 주민의 눈과 귀는 진실과 대면할 수 있었다.
동독이 무너진 데는 주민들의 서독 TV 시청도 크게 기여했다. 서독 주민의 높은 생활 수준을 생생히 전달한 TV 광고는 동독 주민을 공산정권의 주술(呪術)에서 벗어나게 하고, 동독 체제를 무너뜨린 결정타였다. 부크벤더 박사는 “적에게 바른 정보(진실)를 계속 줘 신뢰를 확보하는 게 심리전의 핵심”이라며 “‘신뢰가 왕이고, 진실이 여왕’이라는 경구를 잊어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심리전은 ‘총성 없는 전쟁’으로 불린다. 인명과 재산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서 ‘사상’과 ‘마음’을 무장 해제시켜 적국을 자멸시키기 때문이다. 적국에 살포하는 전단(삐라)을 ‘종이폭탄’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무릎 꿇게 만드는 심리전은 핵무기를 능가하는 ‘절대 무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최근 북한이 상호 비방과 중상 중단을 요구하며 대남 평화 공세에 골몰하는 이유도 충분히 알 만하다. 체제의 허구와 외부세계의 실상을 북한 주민에게 전하는 대북 심리전을 방치했다간 김씨 일가의 세습독재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3대 사기극’의 실체에 눈을 뜬 북한 주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사태는 김씨 정권에 악몽이다. 반세기 넘게 공포통치와 억압으로 쌓아 올린 절대 왕조가 속이 썩어가는 고목처럼 얼마나 허술한지 그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재스민 혁명’ 때 북한 정권이 폭동진압용 기동대를 신설하고, 최정예 호위부대를 국경에 파견해 탈북자를 현장 사살한 ‘광기(狂氣)’에서도 그 위기감이 짙게 배어난다.
‘역공’ 차원에서 남남갈등과 남한 내 종북세력의 의식화를 노린 대남 심리전에도 몰두하고 있다. 통일전선부 산하에 200여 명의 댓글 전문요원으로 이뤄진 사이버 전담부대를 운용 중이고, 최근엔 중국 국경 인접지역에 사이버 심리전 부대까지 배치했다. 최근 북한의 잇단 대남 평화 공세도 고도의 심리전일 개연성이 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군 고위 당국자는 “북한이 올해 한국의 경계심을 허물기 위한 파상적 유화 심리전에 ‘다걸기(올인)’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그런 맥락에서 군 당국이 상호 비방과 중상 중단 합의와 별개로 대북 심리전을 계속 강화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은 옳은 결정이다. 더 치밀하고 수준 높은 심리전으로 북한을 압박해 그들이 진정성을 갖고 대화의 테이블로 나오도록 해야 한다. 북한 주민이 진실에 눈을 뜨게 만드는 심리전은 통일의 단초를 마련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지구상 최악의 동토(凍土)에 진실과 자유의 훈풍을 불어넣는 작업은 절대 멈춰선 안 된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