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떠난 지 25년… 추모문학제 3월 6일 광명시민회관서 개최
기형도 시인(위 사진)의 가족이 광명에 새로 지어 살던 집(아래 사진)에서 ‘엄마 걱정’과 ‘위험한 가계·1969’ 같은 시가 태어났다. 이 집은 2004년까지 철공소로 쓰이다 헐렸다. 시인이 남긴 단 한 권의 시집이자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년·문학과지성사)은 지금까지 26만5000부가 팔렸다. 광명시청·광명문화원 제공
공장 지역의 여공들, 안양천 둑길의 안개, 기아대교 근처 388번 버스 종점…. 한국 현대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기형도(1960∼1989) 시인의 삶과 시의 못자리는 광명이었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안개’를 포함해 ‘위험한 가계·1969’ ‘388번 종점’ ‘엄마 걱정’ 등 기형도의 시 곳곳에는 광명의 풍경이 새겨져 있다.
시인은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뇌중풍으로 숨졌다. 아들이 갑작스레 떠난 뒤 동네사람들은 “형도 엄마가 중얼중얼 거리면서 다닌다”고 수군거렸다. 어머니는 신춘문예에 당선된 아들이 “취직되는 것보다 시인 되는 게 더 좋다. 많은 사람들이 내 시를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을 마음에 새겼다. 어머니는 “우리 아들의 시가 널리 읽히게 해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걸었다고 한다.
기형도 가족은 1964년 당시 경기 연평도에서 시흥군 서면 일직리 뚝방마을에 있는 방 두 칸짜리 기와집으로 이사했다. 광명문화원에 따르면 이 자리는 KTX 광명주박기지 정문 앞으로 추정된다. 기형도가 시흥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듬해인 1968년 이들 가족은 소하리(현 소하동 701-6번지)에 새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1969년 정초 기형도의 아버지는 뇌중풍으로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위험한 가계·1969’) 쓰러지고 만다. 아버지의 급환은 가족의 생활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어머니는 장사에 나서고 누나들은 신문배달을 했다. 막내였던 기형도는 빈 집에서 혼자 숙제를 하며 엄마를 기다렸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엄마 걱정’)
젊은 시인에 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은 소하리 집을 떠나 인근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시인이 살던 집은 2004년까지 철공소로 쓰였고 이후 그 자리에 창고가 들어섰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