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남극기지 건설… 아라온호 아찔했던 순간
아라온호 선상 헬리포트에서 화재진화 중인 선원들.
하지만 남극, 그것도 남위 74도의 현장을 ‘문명사회’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공사를 할 수 있는 기간은 대략 12월부터 2월 말까지 여름 3개월. 2012년, 2013년 햇수로는 두 해지만 실제 공사시간은 6개월에 불과했다. 각국의 남극기지 건설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속도전’이다. 시공사인 현대건설은 인천에서 기지 본관을 미리 조립해보는 ‘연습’을 한 뒤 장비와 자재를 날랐다. 육지 같으면 금방이라도 부족한 자재와 부품을 조달할 수 있겠지만, 남극에서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라온이 위험하다!
공사기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2013년 11월 24일부터 하역을 시작한다는 게 현대건설의 계획이었다. 아직도 기지에서 1000km나 되는 바닷길이 얼어있는 때였다. 공격적인 계획이었다. 아라온호가 앞장서고, 화물선 BBC 다뉴브 호가 뒤따랐다.
문제는 얼음 두께가 2∼2.5m나 되는 기지 부근 6.5km 구간. 설계상 아라온호가 깰 수 있는 얼음의 두께는 1m 안팎이지만, 김봉욱 선장은 “한번 해보자”며 뱃길을 뚫기 시작했다. 얼음이 얇을 때는 한번에 100m, 120m씩 깨고 나갔지만 기지가 가까워질수록 그 거리가 60m, 30m로 줄어들었다. 엔진 힘을 최대한 끌어올려도 그 정도였다.
설상가상. 아라온이 길을 내놔도 화물선이 따라오지 못했다.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얼음을 더 잘게 쪼개줘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37번이나 되풀이했습니다. 세계 쇄빙선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김 선장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라온호 선의(船醫)인 선병호 박사가 “선장이 그 바람에 4일 동안 한숨도 못 잤다”고 하자 김 선장은 “모두 나만 쳐다보고 있는데 그럼 어떻게 하느냐”고 한숨을 쉬었다.
막 잠이 들려고 하는 데 선내 비상벨이 울렸다. 화재경보였다. 말도 안 나오고 입술만 탔다. 시계를 보니 7시 4분. 브리지로 뛰어올라가보니 선상 헬리포트의 카모프 헬기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착륙 도중 헬리포트 바닥과 충돌한 것이다. 선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선장님, 우짭니까∼. 헬기에 9명이나 타고 있답니다.” 갑판장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무전기를 때렸다.
화물선에서 65t짜리 크레인을 빙판 위로 내리는 모습.
목숨을 건 빙상(氷上) 하역
공사를 하는 사람에겐 남극에서의 하루가 육지에서의 한 달보다 더 귀중하다. 헬기 사고를 수습하자마자 아라온호는 ‘부두 만들기 쇄빙’에 나섰다. 화물선이 하역 부두로 이용할 수 있게 얼음을 반듯하게 잘라내는 일이다. 그래야 빙판 위로 자재와 장비를 내릴 수 있다. 미국 맥머도 기지의 경우 인공적으로 6∼7m 두께의 ‘얼음부두’를 만들어 쓴다.
하지만 하역 일정이 지체되면서 얼음 상태가 불안정해졌다.
“다른 나라 사례를 보면 공사를 하면서 기지 앞 바다에 뭘 빠뜨려도 하나씩은 빠뜨렸다고 합니다. 장보고 기지에서 가까운 이탈리아 마리오 추켈리 기지 앞에는 트럭이 한 대 빠져 있고, 중국은 새로 들여온 10억 원짜리 트랙터를 그대로 수장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초기엔 러시아 친구들이 도와주곤 했지만 빙판 위 중장비 하역을 누가 해봤겠습니까? 결국엔 제가 판단해야 하는데 정말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현대건설 곽임구 현장소장)
그럴 때마다 하역 근로자들은 “못하겠다”고 뒤로 물러섰다. 도리가 없었다. 현장소장이 직접 운전석 옆자리에 타는 수밖에.
65t짜리 대형 크레인을 내릴 때가 가장 큰 고비였다. 현장 과장조차 “계속 물구덩이가 생긴다.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함께 가서 얼음 두께를 재본 다음 “아직은 괜찮다”고 하역강행을 지시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2012년 1단계 112명, 2013년 2단계 284명이 투입된 장보고 기지는 그렇게 지어졌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