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 재래시장의 어제와 오늘
남대문시장의 1900년대 초반 선혜청 창내장 시절(①)과 1955년 전경(②), 1972년 중앙 거리 모습(③). 남대문시장은 시대에 따라 곡절을 겪으면서도 수많은 사람이 찾는 한국의 대표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국가기록원·서울시정개발연구원 제공
서울 중구에 있는 남대문시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이다. 점포 약 1만 개가 밀집해 1700여 종의 상품을 취급하며, 하루 평균 이용객만 40만 명이 넘는다. 남대문시장엔 “고양이 뿔 빼고 다 있다”고도 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최근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남대문시장’을 발간해 이 시장의 남다른 역사를 조명했다.
남대문(숭례문) 주변은 조선 건국 때부터 인근 종로 시전행랑(市廛行廊)의 영향으로 크고 작은 장이 섰다. 본격적으로 시장 공간이 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였다. 조선 후기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한양 장시(場市·정기시장)는 4곳. 현 종각 주변인 종루가상(鐘樓街上)과 종로4가 부근 이현(梨峴), 서소문 바깥 소의문외(昭義門外), 그리고 남대문의 칠패(七牌)였다.
난전(亂廛) 성향이 강했던 시장이 지금 위치에 정착한 건 1897년 도시근대화사업의 하나로 선혜청 창고 터에 창내장(倉內場)이란 시장을 만들면서부터다. 현 남대문시장 A동과 B동 사이쯤이다. 윤남률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매일 새벽에 열리던 아침시장(朝市)과 구분되는 근대적 상설시장이 최초로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개항 직후라 해외 상인도 몰렸는데 1907년 기준 조선인 50%, 일본인 30%, 중국인 20%로 구성됐다. 당시 남대문시장은 시장 규모 2위였던 동대문시장보다 거래액이 2.6배 이상 컸다.
융성하던 시장도 일제강점기는 비켜가지 못했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시장규칙’을 반포하면서 구식시장이라며 남대문시장의 해체를 시도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시장이 살아남은 건 친일파 덕분(?)이었다. 매국노 송병준(1858∼1925)이 운영하던 조선농업회사가 운영권을 따내며 허가 취소를 막은 것. 그 대신 엄청난 자릿세를 뜯어갔다. 이후 남대문시장은 일본인 전직 관료나 경제인이 관리하며 이권을 챙겼다.
광복 이후에도 고초는 이어졌다. 6·25전쟁과 1000여 점포가 전소한 1954년 대화재도 한몫했지만, 깡패조직 명동파의 지류였던 ‘엄복만파’가 상인들의 고혈을 짜냈다. 1922년생으로 알려진 엄복만은 대화재 때 전국에서 보낸 성금까지 착복할 정도였다. 1957년 서울시가 남대문시장상인연합회에 운영권을 이양하며 주먹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후 남대문시장은 ‘양키시장’ ‘도깨비시장’으로 불리며 발전했다. 도깨비방망이처럼 뭐든 구할 수 있고, 단속반을 피해 잽싸게 치고 빠진다는 명성을 얻었다. 1967년 동아일보 ‘횡설수설’은 “외국 언론이 (남대문시장을) ‘악마의 골목(devil's alley)’으로 번역해 소개했다”고 전했다. 월남한 실향민이 다수 정착해 ‘아바이시장’이란 별명도 얻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