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1954∼ )
사람이 죽는 줄 알고
죽을 줄도 알지만
죽은 줄은 모르지.
죽은 자가 스스로 죽은 줄 모르고
걸어가는 혹은 다가오는
거리의 사물 형상 빛이 약간 더 생기 있다.
살아 있는지 모르고 살아 있을 때 이따금씩
우리를 놀래키는 그 빛은
때로 약간 더 멀쩡하고 약간 더 본질적으로 보인다.
땅거미 직전 땅거미
예감의 빛.
예감인 빛.
그
차이인 빛.
짐승 소리가 아냐, 그 소리 우리가
죽어도 알 수 없다. 죽음에 무슨 반전? 무엇보다
죽음이 그렇게 노골적일 수 없다.
그건 선물과 명작의 차이랄까.
명작의 값어치를 능가할 수 없는
선물은 명작의 감동에 다가갈망정
끝내 명작일 수 없는
우리 생 속에 생의 일부로 있고 각각의 생애로 빛난다.
‘그러나’가 갈수록 빛바래는 세계.
밤이 딱히 경건한 것 아니라 햇빛이란 게 정말
시끄럽기 짝이 없는 세계다.
밤 깊을수록 오디오 소리 크고 깊어진다.
선물 없다면 어떤 때는 아무리 낯익은 음악도
무섭지.
선물 있다면 죽음이란 살아온 생 거슬러
걸어가는 것일 수도.
명작은 선집을 선물은 전집을 읽는 것과 같다.
‘선물과 명작’에 대응하는 게 뭘까. ‘삶과 죽음’일까…. 풍자적 작가인 한 영국인이 트위터에 올렸다지. “죽음을 절대 두려워하지 마. 너는 네가 죽은 걸 알지 못해. 바보랑 똑같아. 바보는 제가 바보인 걸 몰라. 그 주위 사람이 아는 거지.”
“‘그러나’가 갈수록 빛바래는 세계”에서 민감하고 우울한 화자는 아마 명작일 음악을 듣고 있다. 선물과 명작은 삶에 생기를 부여한다. 선물은 따뜻하게, 명작은 때로 얼음장처럼 차갑게. “밤 깊을수록 오디오 소리 크고 깊어진다.” 내가 아는 시인 김정환은 선집보다 전집을 좋아하는데, “명작은 선집을, 선물은 전집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하네. 모든 생이, 혹은 한 사람의 전 생애가 명작일 수는 없을 테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