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무전기-카메라 잡고… 빙하 녹이는 뜨거운 열정
살다보면 가끔 ‘철없는 사내들’을 만나게 된다. 남극에서도 그랬다. 아라온호 의사인 선병호 박사, 김봉욱 선장, 임완호 다큐감독(왼쪽부터)이 그런 사내들이다. 철없는 사내들의 ‘조연’이 없었다면 장보고 기지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극지연구진흥회 임완호 다큐감독 제공
기자가,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로 향하는 쇄빙선 아라온호에서 쓴 ‘남극일기’ 중 한 대목이다. 돌아온 뒤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아라온호 선의(船醫·ship doctor)를 맡고 있는 선 박사와 김 선장, 그리고 ‘남극의 기록자’인 임완호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선 박사가 63세, 김 선장이 그보다 열 살 아래인 53세, 임 감독이 50세지만 세 사람은 마치 ‘삼총사’처럼 보였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철없는 사내들이라는 점이었다.
‘배에서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귀띔을 받고 3층에 있는 선 박사의 진료실을 처음 찾았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의료기기가 아니라 김 선장의 인물화 스케치였다.
“한 50년 그렸습니다. 중학교 때는 국내 수채화 챔피언이었죠. 전국에서 열리는 사생대회에 참가해 특상이다, 최고상이다 해서 1년에 서른 몇 개를 받았으니까…(웃음). 그러다 집안도 돌봐야 하고 먹고 살기도 편할 것 같아 의대를 갔지만 그림은 계속 그렸습니다.”
선 박사는 부산고를 나와 부산대 의대를 졸업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로 있는 만화가 박재동 씨가 그의 부산고 미술반 후배다.
눈에 띄는 건 인물화 스케치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는 ‘섀클턴의 위스키-탐험의 정신(Shackleton's Whisky-A Spirit of Discovery)’이라는 영어 원서가 들려 있었다. 20세기 초 남극탐험시대의 세 영웅 중 한 명인 영국인 어니스트 섀클턴 경을 다룬 책이었다.
그렇다고 ‘남극에 미친 사내’는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아라온호가 좋아서 ‘선의’가 됐고, 그러다보니 남극까지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그는 요트를 좋아하는 ‘요티(yachtie)’이기도 하다. 현재 부산요트협회 이사도 맡고 있다.
“1977년 의대를 졸업하고 봉직의사(pay doctor)를 하던 중 요트를 알게 됐습니다. 1984년경부터 요트를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했는데 1986년 부산 수영만 아시아경기 때 우리 멤버들이 모두 자원봉사자로 나섰습니다.” 그는 국내 요티 1세대였다.
‘먹고 살기가 편할 것 같아’ 의대를 선택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왕 시작했으니 ‘생사를 다투는 결정적인 분야’를 선택하고 싶었다고 한다. 뒤늦게 서울대병원에서 흉부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을까 하고 고민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포기했다.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도 생긴 뒤였다. 뉴욕의 메모리얼 슬론케터링 암센터(MSKCC)에서 간·담도·췌장을 공부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있었지만 역시 포기했다.
기자=“(웃으며)그랬다면 요트는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아라온호에서도 진료가 없을 땐 선원들의 얼굴에 생긴 점도 빼주고, 정관수술을 해주기도 한다. 이젠 육지의 병원보다 아라온 진료실이 더 편하다.
선원들과 잘 화합할 것 같아 김봉욱 선장을 ‘삼고초려’한 사람도 바로 선 박사다.
아라온의 단짝
아라온호의 선주는 극지연구소이지만, 관리는 STX에서 맡고 있다. 김 선장도 STX 소속이다. 이번이 두 번째 승선이지만 사실은 타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김 선장뿐 아니라 1등 항해사를 비롯한 아라온호의 간부 상당수는 ‘STX 주식 문제’로 냉가슴을 앓고 있다. STX가 대출까지 해주면서 주식을 사라고 했는데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지금은 거의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2011년 7월, 김 선장은 첫 번째 아라온 승선계약이 끝나자마자 광석과 석탄을 운반하는 광탄선으로 돌아갔다. 훨씬 편하고, 보수도 더 좋았다. 그런데 1년 뒤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다시 아라온에 타주셔야겠습니다. 지금 타고 있는 선장이 사표를 냈습니다.” 그래도 그는 못 간다고 했다.
광탄선이 운송을 마치고 전남 여수 광양항에 입항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바로 선 박사였다. 선 박사는 김 선장을 붙들고 밤늦게까지 설득했다. “전임 선장도 사표를 내고 말았는데 이제 아라온이 어떻게 되겠느냐. 김 선장이 다시 맡는 수밖에 없다. 같이 타자.”
극지연구소 대륙기지건설단 준비위원을 맡고 있던 정호성 책임연구원도 전화를 걸어 “장보고 기지 건설은 끝내야 할 것 아니냐”고 호소했다.
배에는 뱃사람들만의 의리가 있고, 극지(極地)엔 극지인만의 의리가 있다. 선 박사는 ‘뱃사람의 의리’를, 정 박사는 ‘극지인의 의리’를 들고 김 선장을 파고들었다.
두 번째 항차는 첫 번째보다 더 힘들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도 있었다. 지난해 말 동남극의 아문센 해(海)에서 연구작업을 할 때였다. 스웨덴 연구팀이 타고 있었는데, 수심 860m 아래 고정해 둔 지진파 연구 장비를 회수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1억 원이 넘는 고가의 장비라고 했다. 스웨덴 팀은 ‘회수불능’으로 포기하고 있었다.
김 선장이 나섰다. 하지만 스웨덴 팀은 코웃음만 쳤다고 한다. 그럴 만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스웨덴은 조선강국이었다. 138m나 되는 세계 최대의 크레인 ‘말뫼의 눈물’은 스웨덴 조선 산업의 상징이었다. 2002년, 그 ‘말뫼의 눈물’을 물려받은 곳이 바로 한국의 현대중공업이었다. ‘우리도 못하는 데 한국이 어떻게?’ 스웨덴 연구팀의 코웃음 뒤엔 그런 우월의식이 있었다.
하지만 김 선장은 보란 듯이 장비를 회수했다. 쇠사슬을 내린 다음, 배를 정밀하게 움직여 감아올리는 방식으로….
3월 말이면 김 선장의 계약이 끝난다.
“어떻게 할 거냐?” 장보고 기지 준공식 전날인 2월 11일, 선 박사 진료실에서 함께 와인을 마시며 단도직입으로 물어봤다. 김 선장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선 박사도 이번엔 거들지 않았다.
남극의 기록자
“두 분은 몰라도 저는 이제 목표가 생겼습니다. 한국이 세종기지를 건설하면서 남극에 진출한지 25년이 됐는데, 30년이 될 때까지만 한번 가보자는 겁니다. 그 사이에 남극진출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한두 편은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 선장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뒤늦게 합류한 임완호 감독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한겨레신문 사진기자로 일하다 1995년 ‘다큐에 꽂혀’ 뛰쳐나온 임 감독은 “지금이 신문사 있을 때보다 100배는 더 즐겁다”고 했다.
남극을 만난 건 충남 서산의 폐가를 빌려 자연다큐멘터리를 준비할 때였다. 극지연구소의 김정훈 박사가 당시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폐가에 함께 기거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극을 가게 됐다고 했다. 김 박사는 ‘남극의 매’라고 불리는 스쿠아(skua)를 연구하고 있었다. “감독님, 남극에 펭귄이 무지 많아요!” 남극에서 돌아온 김 박사의 그 말 한마디에 임 감독은 짐부터 쌌다.
하지만 역시 경제적 현실의 벽은 넘기 어려웠다. 어린이 교육용 다큐도 만들고, 순천만 정원박람회 다큐 작업도 했지만 집에 생활비를 갖다 주기가 힘들었다. 남극 다큐는 그만 포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무렵, 다행히 극지연구소의 정호성 박사가 한국극지연구진흥회 윤석순 회장을 연결해줬다. 지금은 극지연구진흥회의 지원을 받고 있다.
“펭귄 2부작을 만들었는데 8년 동안 남극을 왔다갔다 하다보니 대한민국의 극지 진출 역사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직접 찍고, 자료도 모으고 하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방송사도 갖고 있지 못한 영화용 카메라까지 갖췄습니다. ‘반지의 제왕’을 찍었던 카메라입니다. 잘만 정리하면 섀클턴 탐험대의 작품 같은 게 하나 나올지 모릅니다.(웃음)”
섀클턴 경의 탐험대도 그랬지만, 로버트 팰컨 스콧 탐험대 역시 기지에 암실까지 마련해가며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이제 시작이지만, 그래도 이런 이가 있어 암울하지만은 않다.
철없는 사내들이 역사를 만든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