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둘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며 세상 고통에 눈뜨게 됐다”
“수학은 지적 호기심을 채워준 취미이자 성공의 열쇠이며 아픔을 치유해 준 선물이기도 했다”는 제임스 사이먼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 설립자. 세계적인 재벌이지만 옷차림과 사무실은 지극히 소박했다. 뉴욕=장영웅 사진작가
작은 사무실에 가구라고는 책상과 소파, 책꽂이가 전부였다. 책꽂이에도 수학책 몇 권과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가 다였다. 첫인상도 2010년 은퇴 전까지 300여 명에 달하는 직원과 매년 우리 돈 12조 원 규모를 굴리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람 좋은 시골 노인처럼 보였다.
그를 만나기로 한 것은 올여름(8월 13일) 그가 생애 처음으로 한국을 찾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수학올림픽인 세계수학자대회(ICM)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사이먼스 씨는 세계적인 펀드매니저 이전에 세계적인 업적을 낸 수학자이기도 하다. 1974년 독특한 기하학적 측정법을 고안해 미분기하학자인 천성선(陳省身)과 함께 ‘천-사이먼스 이론’을 만들어 유명해졌고 2년 뒤인 1976년에는 미국수학협회가 주는 오즈월드 베블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상은 미국 수학자 오즈월드 베블런의 업적을 기려 제정된 것으로 3년에 한 번 기하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운 수학자에게 주는 상이다.
하버드 교수직 버리고 금융인의 길로
대화는 먼저 그의 독특한 이력을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박형주(이하 박)=23세라는 어린 나이에 하버드대 수학 교수가 됐지만 4년 만에 때려치우고 돌연 국가안보국(NSA)에서 일한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특별한 계기라기보다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NSA에서 일할 때에도 근무시간의 반은 암호 해독을 했고, 반은 수학 연구를 했다. 내가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면 프로그래머들이 프로그램화해 줬다. 내 아이디어가 맞는지 틀린지 컴퓨터로 테스트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웠다. 여기서 했던 일들이 훗날 금융권에서 수학 모델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었는데 뉴욕타임스에 ‘베트남전쟁은 무모하다’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그것을 본 한 기자가 인터뷰를 청해 왔다. ‘업무시간에 주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길래 ‘수학 연구를 한다’고 답했는데 이게 일은 안 하고 개인연구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문제가 됐다. 다행히 바로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에 교수 자리가 나서 그리로 옮겼다.”
그는 “물론 습관이 되면 안 되겠지만(웃음) 학생들에게 인생에서 한 번쯤 해고를 당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이야기해 준다”며 “그 일로 깨달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의 성공비결, 협력과 공유
―박=하지만 다시 교수를 때려치우고 금융으로 진로를 바꿨다.
그는 상아탑을 나온 뒤 1976년 금융권으로 진출하자마자 2년 뒤 월가로 진출했다. 그리고 1982년 헤지펀드 운용 회사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를 설립했고, 이후 이 회사의 대표 펀드인 메달리온 펀드를 개발해 큰 성공을 거둔다. 1988년 출시한 이 펀드의 수익률은 연평균 무려 30%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발 금융위기로 월가의 많은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대규모 손실을 입고 쫓겨날 처지에 몰렸을 때도 그는 이듬해 3조 원이 넘는 연봉을 챙겼을 정도였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그를 두고 ‘사이먼스만큼 다른 영역에서 성공한 수학자는 없다’고 했다.
박=수학을 잘한다고 해서 큰돈을 버는 것은 아닐 텐데 비결은 무엇이었나.
“한마디로 ‘협력과 공유’라는 팀 문화였다고 생각한다. 우리 직원들은 주로 수학 물리학 천문학 전산학 통계학 같은 자연과학자들과 공학 전공자들인데 일주일에 한 번 모두 모여 서로가 하는 일을 모두 공유했다(실제로 르네상스 테크놀로지가 금융 경제 경영 전공자들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은 월가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어떤 팀이 성공 모델을 만들면 바로 매매 시스템으로 적용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연봉도 당장 한 해 실적을 바탕으로 주지 않는다. 몇 년에 걸쳐 한 일을 종합 판단하고 다른 사람의 성공의 일부를 나눌 수 있도록 회사 이익 중 일부를 지급한다. 그래야 서로가 잘될 수 있도록 협력하기 때문이다. 또 컴퓨터의 지시를 절대 무시하지 않는다. 개개인의 의견은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철저히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수학적인 분석만을 토대로 의사결정을 한다.”
제임스 사이먼스 씨와 대담하고 있는 박형주 위원장(포스텍 수학과 교수·왼쪽).
박=르네상스 테크놀로지는 금융을 공부한 사람을 뽑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직원 300여 명 중 100여 명이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 과학자에게 금융을 가르치는 것이 금융인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쉽다. 덧붙여 나는 금융보다는 과학을 더 잘 안다. 금융인에 대한 판단보다 어떤 과학자가 좋은 펀드매니저가 될 수 있을지는 더 잘 보인다.”
8월 생애 첫 한국 방문
대부호인 그도 워런 버핏처럼 자선가의 길을 걷고 있다.
은퇴 전인 1993년 사이먼스 재단을 만든 이후 주로 자선 기부만 하다가 은퇴 후에는 과학연구 후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90%가 과학연구 지원이고, 10%가 봉사활동이라고 한다. ‘퀀타’라는 과학 잡지도 만들고 있다. 1년 전부터는 아프리카 3, 4개의 대학과 협력하여 수학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브라질 수학자들에게도 교수직과 연구비를 제공하고 있다.
겉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그이지만 남모르는 고통도 있었다. 다름 아닌 두 아들의 죽음이었다. 그는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장남인 폴이 1996년 자동차 사고로 죽었고 둘째아들 닉이 2003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익사했다. 그는 “아들 둘을 잃고 참을 수 없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결국 수학으로 잊어야겠다고 생각해 수학 연구에 몰두했다. 수학이 나를 구했다”고 말했다.
한 번도 겪기 힘든 참척(慘慽)의 고통을 두 번이나 겪은 그는 이후 더 열심히 자선 기부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2006년에는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수학과와 물리학과에 2500만 달러(약 267억9500만 원)를 기부했고, 2011년 1억5000만 달러(약 1607억7000만 원)를 추가로 기부했다. 2004년부터는 좋은 수학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에도 힘을 쏟고 있다. 또 네팔에서 일했던 둘째아들 닉의 뜻을 기려 네팔 의료 환경 개선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딸이 앓고 있는 자폐증의 원인을 밝히는 연구에도 기부하는 것은 물론 가족 유전자(DNA)를 연구용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도전과 열정으로 점철된 그의 드라마틱한 삶의 이야기는 세계수학자대회 개막식 당일인 8월 13일 오후 8시 서울 코엑스에서 펼쳐진다. 참가를 원하면 누구나 무료로 참석할 수 있다. ―뉴욕에서
:: 제임스 사이먼스는 ::
1938년 보스턴에서 제화공장 사장 아들로 출생
1958년 매사추세츠공대(MIT) 수학 학사
1961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미분기하학 박사
1961∼64년 MIT·하버드대 수학 교수
1964∼68년 미국 국가안보국(NSA)에서 암호 해독담당관
1968∼76년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수학 교수
1974년 천-사이먼스 이론 발표
1978년 월스트리트 헤지펀드 업무 시작
1982년 헤지펀드 회사인 르네상스 테크놀로지 설립
2007년 연봉 28억 달러(약 3조352억 원)
2010년 펀드매니저 은퇴
2010년∼ 사이먼스 재단 위원장
대담=박형주 세계수학자대회 조직위원장
정리=조가현 동아사이언스 기자 gahy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