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트렁크에 2억 돈상자 25개” 진술, 현장검증 결과가…
2003년 10월 국회 현대비자금 국정감사장에서 증인 선서를 하고 있는 이익치, 박지원, 권노갑 증인(왼쪽부터). 비슷한 현대비자금 사건이지만 박지원 재판부는 무죄를, 권노갑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했다. 동아일보 DB
검찰자료에 내가 200억 원을 요구하자 정몽헌 회장이 현대상선 김충식 사장에게 이 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고, 김충식 사장은 현대상선의 외화계정에서 달러를 빼내 이 돈을 마련했다고 했다. 그런데 마련한 금액은 200억 원이 아니라 205억6900만 원이었다고 한다.
우선 이 점이 수상하다. 내가 200억 원을 달라고 했는데 왜 5억6900만 원을 더 붙여 인출했다는 것인가?
김충식 사장이 돈을 나르는데 사용했다는 승용차만 해도 그렇다.
200억 원을 동일한 방법으로 4∼5차례에 나누어 운반했다면 한 번에 50억 원 또는 40억 원씩 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이 돈을 김충식 사장의 다이너스티 승용차에 실었다는 현대상선 직원은 한 상자에 현금 2억 원씩을 담았다고 증언했다.
재판부는 내 변호인의 요청에 따라 과연 2억 원이 들어간 상자 25개가 다이너스티에 다 들어가는지, 또 그것을 싣고 정상적으로 달릴 수 있는지를 가리기 위해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그 결과 다이너스티엔 2억 원이 들어간 상자 25개가 실릴 수 있고, 또 달리는 데도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내 변호인의 판정패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돈을 나를 때 이용한 차종은 다이너스티 리무진이다. 리무진은 트렁크 위쪽의 아이스박스 공간 때문에 일반 다이너스티보다 트렁크 공간이 좁다. 이날 현장검증에 사용된 차는 아이스박스가 없는 다이너스티였다. 내 변호인은 이 문제를 제기하고, 아이스박스가 있는 다이너스티 리무진에 옮겨 실을 것을 제안했다. 실험 결과 이번엔 25개의 상자가 다 들어가지 않았다.
○어이없는 판결
돈 운반과정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여기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로부터 돈을 받은 김영완 씨가 그 돈을 내게 과연 전달했느냐 하는 점이다.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것은 외국으로 도망간 김영완 씨의 자술서와 이익치 회장의 진술뿐이었다. 그의 주장이 옳다면 그 역시 범죄자다. 그런데 왜 검찰은 김영완 씨에 대해서는 범죄인 인도요청을 하지 않은 것인가?
김영완 씨만 잡아오면 모든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것 아닌가?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검찰은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마침내 2004년 1월 9일 1심 선고공판이 진행되었다. 재판부는 내 변호인이 조서의 여러 허점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능력에 대해 “조서 작성 시 강압적 분위기가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진술과도 상당부분 일치해 증거능력과 신빙성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이건 아니다. 하늘이 알 것이다”하고 나는 말했다.
○사건을 재수사해야
재판을 맡은 서울지법 형사3단독 황한식 부장판사는 선고를 내리기에 앞서 “신이 아니어서 진실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증거를 통해 진실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며 “오판이 아니기를 기도하고 억울하면 항소하십시오”라고 이례적으로 토를 달았다. 판사도 내가 현대 측으로부터 200억 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기는 어려웠다는 뜻이 아닌가.
그럼에도 재판부가 현대 측 사람들의 증언만으로 내게 유죄판결을 내린 것은 내가 ‘국민의 정부’에서 정권실세였으니 으레 정경유착을 하지 않았겠느냐는 일종의 정치적 재판이었지, 내가 실제로 돈을 받았느냐 아니냐 하는 사실을 판가름하는 사법적 재판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항소심과 대법원 판결에서도 나는 말하자면, 그 같은 정치적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다.
구속과정에서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것은 외국으로 도망간 김영완 씨의 자술서와 이익치의 진술뿐인데, 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김영완 씨의 자술서에 대해서는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박지원 재판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익치 회장의 진술에 대해서는 달랐다. 박지원 재판부는 증거로 채택하지 않은 반면, 내 재판부는 증거로 채택했다. 대한민국의 형법은 나에게 적용되는 법이 다르고, 박지원에게 적용되는 법이 다르다는 말인가?
나는 2007년 2월 11일 의정부교도소를 나왔다. 기자들이 출옥소감을 물었다.
“나는 분하고 억울하고 피나는 아픔의 세월을 살았다. 진실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에 반드시 밝혀진다. 나는 일생 동안 정의를 갖고 살았으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렇게 답변한 후 나는 이날 오전부터 출감을 기다리던 민주당 당직자들과 악수를 나눴다.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은 아직 밝혀진 것이 아니다. 나는 추후에라도 검찰이 김영완 씨를 미국에서 불러들여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대한민국 검찰이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고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법과 원칙에 따라 공명정대하게 검찰권을 행사하는’ 기관이라면 말이다.
수감 직후 내가 아직 억울함과 분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나를 ‘마음의 감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있다. 그 가운데는 언론에서 ‘악연’이라는 용어로 나와의 관계를 정의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정동영 의원이다.
▼ 김영완을 내치지 못한 죄 ▼
억울하다는 권노갑의 진짜 죄목?
“나는 추후에라도 검찰이 김영완 씨를 미국에서 불러들여 진실을 밝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노갑 고문은 회고록에서 그렇게 주장했지만, 검찰은 2013년 6월 김 씨를 최종 무혐의 처분하고 10년간에 걸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회고록은 그 전에 탈고됐다). 그러나 마무리된 것은 법률적 다툼일 뿐이다.
‘왕자의 난’까지 이겨내며 고(故) 정주영 회장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정몽헌 회장이 왜 자살을 했는지, 김대중 정부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줬다는 150억 원과 권 고문에게 전달했다는 ‘3000만 달러+200억 원’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등등… 미스터리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그 끝에, 검찰이 수사과정에서 압수한 121억 원의 ‘주인’을 찾는다며 광고까지 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정말 희한한 일만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김영완 씨 집에 강도가 들어 180억 원을 털어갔다는 보도는 오히려 ‘경미한 사건’으로 취급될 정도였다.
의문이 꼬리를 물자 민주당 김동철 의원은 2006년 10월 대검찰청 국정감사장에서 ‘배달사고’ 가능성을 공식 제기했다. “범죄자는 따로 있는데, 말하자면 김영완과 이익치가 정몽헌 회장을 기만해 일으킨 배달사고라고 볼 수 있는데 검찰의 예단이 심했던 것 아닌가.”
김 의원은 정황증거도 제시했다.
“1999년까지 김영완의 종합소득세는 1700만 원 정도인데, (비자금 사건이 발생한) 2000년 이후엔 1억 원 이상으로 증가했고, 2002년엔 무려 1억9400만 원의 종합소득세를 냈습니다. 김영완이 착복했다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 아닙니까? 그리고 2000년 이후 J&C캐피탈 등 법인을 무려 3개나 만들었고, 이들 3개 법인이 소유한 서울 강남 부동산이 수백억 원을 호가합니다.”
정상명 당시 검찰총장의 대답이 흥미롭다. “검찰이 자존심이나 오기 같은 걸로 (수사를)하지 않습니다. (중략) 이 사건은 기록이 오면 한번, 저도 실제로 상당히 궁금합니다.”
돌이켜보면 권 고문이 ‘유죄’인 건 맞다. 대법원 판결이 그렇게 났다고 해서가 아니다. 김영완이라는, 처음부터 잘못된 인연을 깨끗하게 내치지 못하고 그냥저냥 이어간 그의 ‘정실(情實)’만큼은 유죄라는 것이다.
“우리 집에 온 손님들과 인사를 나눌 때도 명함을 꺼내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골프를 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같이 기념촬영을 했는데 나중에 사진을 보면 김영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서도 권 고문은 ‘무기중개상이라 그런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다. 권노갑 특유의 ‘무신경함’이다.
권 고문은 김영완 씨 소유 빌라에서 전세를 살았던 적도 있다. 김영완 씨가 새로 집을 지으면서 빌라를 내놨는데, 마침 동네 공인중개사가 ‘전세 1억 원’에 알선했다는 것이다.
“영완이가 집들이를 한다고 해서 가봤는데 김태정 검찰총장하고 박주선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앉아 있더라.” 김영완이라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사업을 하는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장면이었지만, 권 고문은 그를 내치지 못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