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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접속과 단절 사이

입력 | 2014-03-15 03:00:00

◇단속사회/엄기호 지음/308쪽·1만5000원·창비




단속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현실에서는 남들과의 만남과 부딪힘을 피하려고 스스로를 철저히 ‘차단’시키지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처럼 취향이 같은 이들과의 공동체에는 늘 ‘접속’해 있으려는 중독자 같은 모습을 보인다. 창비 제공

직장 회의시간. 동료의 발언 시간을 틈타 스마트폰 화면에 슬그머니 페이스북 페이지를 띄운다. 방금 전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올려놓은, 자신을 ‘멘붕(멘털 붕괴)’으로 몰아넣은 회사 상사에 대한 짜증 가득한 험담에 지그시 ‘좋아요’를 누른다. 폭등하는 전세금에 망연자실한 대학 친구 녀석의 투덜거림, 돌을 넘긴 자녀를 보낼 어린이집 대기인원 수를 확인하곤 ‘패닉’에 빠졌다는 지인의 하소연에는 ‘좋아요’와 함께 ‘나도, 나도’ 하는 식의 댓글도 남긴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 사이버세계에서 실시간 위로와 맞장구를 주고받으면서 드는 묘한 ‘힐링’의 기분. ‘다들 사는 게 별거 없구나’ 하는 찰나의 안도감도 잠시. 이런 의문이 안도감의 틈을 비집고 스멀스멀 밀려든다. ‘이게 다일까? 이런 관계 맺기로도 우리는 충분히 가까운 걸까?’

이 책은 이런 의문에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답한다. 아니라는 대답을 넘어 ‘중산층’이나 ‘동호회’, ‘페친’처럼 오늘날 우리가 동질감을 느끼는 나와 닮은 이들과 피상적 교류에서 얻는 힐링의 느낌과 안도감은 현실에서 금세 무력감과 피로에 잠식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과몰입이나 TV토크쇼나 서점가를 점령한 ‘힐링’ 열풍은 사실 가정과 학교, 직장과 지역 공동체 같은 현실 세계의 불통(不通)이 가져다 준 스트레스의 임시방편 해소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문화인류학자로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같은 전작들에서 불안과 무기력에 빠진 청년세대의 삶을 조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온 저자는 이 책에선 오늘날 한국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개념으로 ‘단속’을 제시한다. 여기서 단속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나와 다른 의견이나 타인의 고통 같은 이질적 요소들과는 철저히 ‘단절(斷切)’하면서 나와 비슷하거나 동질적인 취미공동체에는 과도하게 ‘접속(接續)’한다는 의미의 ‘단속(斷續)’인 동시에, 이질적인 타인과의 만남이나 의존을 피하려고 스스로를 통제하고 다잡는다는 의미의 ‘단속(團束)’도 된다.

저자는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을 경험하기 힘든 단속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선 서로에 대한 헌신도, 서로가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타인은 소통의 대상인 ‘너’가 아니라 내게 ‘짜증’이나 ‘멘붕’을 일으키는 ‘남’에 불과하다. 이곳에서는 타인에게 환대를 베풀 이유도 없고 환대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적대적 표정을 감추기 위한 최소한의 분칠을 한 ‘예의바름’이 단속사회 구성원들의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최고의 덕목이 된다.

이 책은 지난해 저자의 연세대 문화학 박사학위 논문 ‘단절-단속 개념을 통해 본 교육적 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연구’의 핵심 내용과 사례를 대중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근대 사회가 토대를 세우고 신자유주의가 완성한 단속사회 안에서 좌절하고 체념한 다양한 현장의 사례와 지그문트 바우만, 테오도어 아도르노 같은 이들의 주체성과 근대성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하나로 꿰어냈다. 난해한 수입 용어 대신 ‘함’과 ‘쉼’, ‘곁’과 ‘편’ 같은 쉬운 일상용어로 논의를 이끌어 가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저자는 단속사회에서 벌어지는 불통의 악순환을 치유할 방법으로 ‘경청(敬聽)’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한다. 그는 경청의 의미가 단순히 ‘주의를 기울여 남의 얘기를 듣는다’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경청은 좀더 적극적 의미에서 타인의 말문을 열게 하는 일종의 말 걸기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는 경청에 내제된 말 걸기의 힘이 ‘나’와 ‘남’ 사이에 놓인 ‘거리’를 ‘나’와 ‘너’ 사이의 ‘관계’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배제의 정치, 수의 정치에 맞서 ‘환대(歡待)’가 있는 삶의 정치, 진정한 공적 공간을 열어갈 힘도 그 시작은 타인의 목소리와 고통에 귀 기울이고 말을 거는 경청이 되어야 한다는 것.

아쉬운 부분도 있다. 책의 뼈대가 된 저자의 학위논문이 교육 현장의 불통 문제를 다루는 데 주력한 영향인지, 이 책에서 언급된 현장 사례의 상당수가 학교 현장의 얘기로 채워져 있다. 단속사회가 도래한 원인을 규명할 때도 근대성 일반의 필연이라는 관점과 국내 특정 정치세력의 집권 때문이라는 관점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