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1932∼1986) [잊지 못할 말 한마디]이윤택(연극 연출가)
이윤택(연극 연출가)
‘아, 저 여자는 남자를 사랑할 때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저 남자는 저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구나.’
나는 예술이란 이름으로 기괴하고 특별한 미장센을 내세우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때 영화광들의 불법 비디오 복제물로 자주 오르내렸던 피에르 파솔리니의 영화도 자극적이지만 싫었다.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은 우화극 같아서 그저 그랬고, TV 3부작 ‘화니와 알렉산더’는 안데르센 동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을 넘어가던 어느 날 문득, 내 손에 타르콥스키의 영화 ‘희생’ 비디오테이프가 입수됐다. 세 시간 가까이 그 느린 영상속도를 견디느라 혼이 났다. 졸음이 엄습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잠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 수 없었다. 느릿하게 지나가는 장면들이 더욱 집요하게 내 잠을 들쑤시고 다녀서 비몽사몽간에 현실과 꿈속의 경계를 넘어 다닌 듯하다. 그렇게 세 시간 가까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절정의 미장센을 마주하게 된다.
언덕 아래 집은 불타고, 늙은 남자는 낮은 진흙땅을 미쳐 돌아다닌다. 신, 혹은 마리아는 칠분 능선쯤에 서서 인간의 운명을 내려다볼 뿐. 아주 작고 흰 앰뷸런스가 오고 있다.
시적 상징과 삶의 철학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면이다. 아, 영화라는 것이 시와 철학과 그림과 음악과 연극과 무용을 모두 한 장면 속으로 호출하는구나. 영화가 결국 삶의 총체적인 장관을 보여주는구나.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부패한다.’
1986년 타르콥스키가 칸 영화제 그랑프리상을 받고 죽던 해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란 나의 첫 시나리오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그렇게 나의 글쓰기는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연극판을 기웃거리고 있다. 타르콥스키가 남긴 그 말 한마디는 여전히 목의 가시처럼 남아서 나의 삶을 불편하게 한다.
이윤택(연극 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