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산업 시설은 북쪽에 몰려 있었다. 흥남비료공장, 수풍수력발전소, 청진제강소가 대표적이었다. 1945년 광복 후 북한이 남쪽에 보내던 비료와 전기 공급을 끊자 남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통계청의 1999년 분석 자료를 보면 1960년에도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83달러)은 북한(280달러)의 3분의 1을 밑돌았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작년 북한의 1인당 명목 국민소득이 854달러로 남한(2만3838달러)의 3.6% 수준에 그친 것으로 추정했다. 남북한 소득 격차는 약 28 대 1이다. 북한의 1인당 소득은 라오스 미얀마 방글라데시보다도 낮았다. 김천구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북한의 1인당 소득은 세계 187개국 중 162위”라며 실질 기준으로 하면 남한의 1960년대 후반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1970년대 중반 역전돼 갈수록 커진 남북한의 경제력 격차는 저명한 해외 학자들도 연구 주제로 삼는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북한 주민이 남한 주민보다 경제활동 역량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옛날부터 개성 평양 원산의 이재(理財) 능력은 서울 대구 전주보다 한 수 위였다고 한다. 한국이 택한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와 북한의 극좌 전체주의-계획경제라는 체제 차이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지도자들의 역량과 리더십 차이도 중요한 변수였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등 대한민국을 자유 진영에 편입한 ‘건국의 아버지들’, 지긋지긋한 가난의 질곡을 벗어나게 한 경제대통령 박정희의 업적은 크다. 산업화에 이은 과제인 정치적 민주화를 궤도에 올린 김영삼 김대중 역시 이승만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과오도 있지만 큰 흐름에서는 국가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 대통령이었다. 반면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북한 3대 세습 체제는 극소수 특권층만 뺀 대다수 주민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실패와 몰락의 역사였다. 광복 70년을 한 해 앞둔 지금 승패가 명백한 남북한 현대사를 둘러싸고 시대착오적 미망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일부 세력이 큰소리치는 현실이 가슴을 무겁게 한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