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 회오리 같았던 음악인생… 이젠 저 낮은 아프리카로
서울 서초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선 김청자. “되돌아보면 내 삶은 ‘사랑을 향한 끝없는 열정’이었으며 음악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970년 한국인 최초로 유럽오페라무대에 올랐던 메조소프라노. 독일 카를스루에 국립오페라단원을 비롯해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 16년간 이름을 날렸던 성악가. 독일 뒤셀도르프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로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뉴욕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등에서 독창회까지 가질 정도로 잘나가던 그였다.
더구나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있었다. 남편은 세 살 아래의 독일인, 그리고 아들은 나이 마흔에 얻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보물이었다. 하기야 1982년 남편을 만날 때도 한바탕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후 뮌헨-샌프란시스코 사이의 전화통이 날마다 불이 났다. ‘사랑의 열병’이 펄펄 끓었다. 그 스트레스로 목소리가 안 나와 노래를 부를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난 네 살 연하의 첫 번째 남편(오스트리아)과 별거 중이었는데, 가톨릭신자로서 다른 남자를 사랑해도 되는 것인지 마음의 갈등이 심했다. 첫 번째 남편은 빈 국립음대에서 만난 첼리스트였는데, 1972년 내가 귀국할 때 같이 들어와 중앙대에서 5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욕심이 없었다. 지방악단 첼리스트로서의 삶에 만족했다. 반면 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결혼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결국 김청자는 저질렀다. 극장에 두 달의 병가를 내고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 그 독일 남자의 ‘사랑을 재확인’했다. 그 남자도 기꺼이 샌프란시스코 엔지니어의 삶을 포기하고 김청자 곁으로 날아왔다. 당시 김청자는 그를 위해서라면 노래도 포기할 수 있었고, 아이도 낳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남편과의 이혼 문제는 그 후에 깨끗하게 마무리됐다. 그렇게 김청자는 10여 년 동안 사랑에 푹 빠져 살았다. 알콩달콩 세상사는 재미에 성당발걸음까지 뜸해졌다.
김청자가 한국에 가겠다고 하자 남편과 아들은 펄쩍 뛰었다. 그래도 김청자는 그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무엇이든 하겠다고 한번 마음먹으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그만큼 새로운 삶에 목이 말랐다. 더이상 유럽오페라무대에선 이룰 게 없었다.
김청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와서도 2년 동안 독일을 오가며 가정과 일을 병행해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그건 무리였다. 남편이 먼저 다른 여자를 택했다. 그것도 김청자가 친하게 지내던 이웃집 여자였다. 김청자보다 여덟 살이나 아래였는데 아들 하나가 딸린 ‘돌싱’이었다. 동생같이 여기고 잘해줬는데, 정말 분노가 치솟아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김청자의 고향은 강원도 춘천. 열한 살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춘천 중림동성당에 나간 것이 음악과 신앙생활의 첫발이었다. 그곳에서 아일랜드 신부님의 배려로 피아노를 배웠고, 1963년 서울 진명여고를 졸업하고서도 외국신부님의 도움으로 독일에 간호보조원으로 가게 됐다. 대학진학은 집안형편상 어림도 없었다. 그는 독일에서 간호보조원 생활 딱 5개월 만에 신데렐라가 됐다. 병원에서 짧은 독일어로 ‘내 꿈은 음악공부’라고 입에 달고 살았던 게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어느 사모님 환자 두 분의 소개로 아우크스부르크 음대 오디션을 보았는데 거뜬히 합격했다. 또한 그분들이 중심이 돼 학비까지 지원해 줘 졸업할 때까지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었다. 빈 국립음대 대학원도 독일가톨릭신자들의 장학금 모금 덕분에 해결됐다.
“난 어릴 적부터 뭐든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졌다. 하느님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에겐 반드시 지혜를 주신다고 믿는다. 난 2남 5녀의 셋째였는데(위로 언니, 오빠), 호기심이 많고, 도무지 두려움 같은 게 없었다. 도전정신이 강했다. 평생 뭔가 늘 새로운 것을 꿈꾸며 살았다. 고등학교를 굳이 서울로 간 것도 그렇고, 조그마할 때부터 ‘반드시 독일에 가서 음악공부를 할 것’이라고 다짐했던 것도 그렇다. 물론 그만큼 독하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영림소 직원이었는데 가난했지만 키도 훌쩍 크고, 놀기 좋아하는 한량이었다. 언제나 ‘내 딸 청자를 믿어! 우리 청자가 최고야’라며 내 등을 두드려 주셨다. 난 모두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만큼 성취욕과 명예욕이 강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성악, 피아노는 물론 작곡에 합창지휘까지 두루 잘해 ‘아마추어 베토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난 어딜 가나 고향이 없었다. 춘천에서 서울에 유학했을 때도 그렇고, 독일에 갔을 때도 그랬다. 후에 교수로 한국에 와서도 이방인이었다. 대학동창도 없고, 대학스승도 없고, 외국사람과 결혼하다보니 사회적으로 어디 낄 데도 없었다. 어딜 가나 ‘영원한 이방인’ 같은 느낌. 난 천생 자유인일 수밖에 없었다.”
1998년 김청자의 아들 다니엘은 3년 만에 아빠의 부름으로 독일로 돌아갔다. 그리고 베를린음대에서 재즈를 공부했다. 재학 중 ‘안드로메다 재즈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높은 평가도 받았다. 2009년인가, 아들의 뮌헨 공연이 있었다. 사흘 동안 이어졌는데 김청자는 그중 하루 공연을 보러 갔다가 전 남편부부를 만났다. 그들도 약속이나 한 듯 우연히 ‘그날 그 시간’에 연주를 보러 온 것이다.
모든 게 풀렸다. 김청자가 다 내려놓으니 아들 다니엘도 행복했고, 전 남편부부도 행복해졌다. 김청자는 머리로는 진즉 ‘자신 탓’인줄 깨닫고 있었지만, 그날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강 같은 평화가 잔잔하게 밀려왔다.
▼검은 대륙에 꿈과 희망의 씨앗… “미술-무용-태권도-축구 가르쳐줄 분 기다려요”▼
“날마다 행복” 말라위 아이들과 제2의 인생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유학온 말라위 제자들과 함께. 김청자 씨 제공
“난 평생 성악가로서 차고 넘치도록 누렸다. 명성과 인기도 얻었고 과분한 사랑도 받았다. 많은 분들로부터 너무 받기만 했다. 그 감사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젠 내가 그 만분의 일이라도 되돌려줘야 할 때다. 2004년 12월 28일 내 나이 예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밤새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 이듬해 남아공과 잠비아를 여행하면서 비로소 해답을 얻었다. 잠비아에서 뼈만 남은 아이들이 나한테 찰싹 매미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순간, 아∼ 마지막 ‘내 영혼의 고향’은 이곳이구나 깨달았다. 그 아이들의 따뜻한 체온과 떨림이 두고두고 가슴에 저려왔다. 그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고 싶었다.”
아프리카중동부 말라위는 인구 1400여만 명의 빈곤국가. 평균수명이 40세에도 미치지 못한다. 젊은 엄마들이 에이즈로 속절없이 죽어간다. 보통 10대 때부터 10여 명씩 낳는데, 출산 중 죽는 경우도 허다하다. 국민의 70%가 청소년이며 그중 100만 명이 고아다. 그들은 배울 곳도 거의 없고, 할 일도 없고, 놀거리도 마땅치 않다. 술, 마약, 섹스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날씨도 건기 막바지땐 섭씨 50도까지 치솟는다. 이렇다할 자원도 없어 그걸 미끼로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다. 사람들 성품은 온유하다. 일부다처제인데도 부인끼리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우울병에 걸리거나 자살하는 사람도 없다. 부모가 죽으면 친척들이 데려다 키운다.
김청자가 있는 곳은 말라위 북부 카롱가 지역의 루스빌로(Lusubilo·희망)공동체. 75개 마을의 1만여 고아들을 돌보는 조직이다. 벌써 김청자후원회의 도움으로 청소년회관이 4곳이나 들어섰다. 김청자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이곳에 뮤직센터와 미술학교를 열었다. 그 결과 3년 만에 전국대회 1위 밴드를 배출했고, 3명의 학생이 학비면제(기숙사생활)로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유학하게 됐다. 지난해엔 한국에서 말라위아이들의 전국순회그림전시회도 가졌다. 올 10월(23, 24일)엔 국립극장에서 말라위학생들의 공연도 펼쳐진다. 사람들은 이 공연을 김청자 어머니(90)와 김청자(70) 그리고 그의 아들(30) 나이를 합쳐 ‘190세 잔치’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이때 뮤직센터기숙사 건립 후원금 모금도 곁들일 예정이다.
“난 희생이나 순교의 삶이 아니라 그들의 맑고 순수한 영혼과 더불어 기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이들은 나를 ‘엄마’나 ‘마미’라고 부른다. 짜장면, 잡채, 카레라이스, 스파게티 등을 해주면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가 없다. 그 모습을 보면 참으로 행복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선 2012년과 지난해 2년 연속 자원봉사단을 보내줬는데 정말 고맙다. 방학 때 잠깐이라도 미술이나 무용 그리고 태권도, 축구를 가르쳐 줄 봉사자가 있으면 좋겠다. 아들 다니엘도 해마다 재즈워크숍 봉사를 하러 온다. 난 이곳 뮤직센터를 뮤직칼리지로 만드는 게 꿈이다. 여기서 공부한 아이들이 스승으로 돌아와 후배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됐으면 한다. 그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 시간, 능력을 다 소진하고 나면 하느님께서 나를 데려가실 것이다. 난 이곳에서 뼈를 묻고 싶다. 아프다고 징징대며 한국의 병원으로 날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평선에서 해가 떠서, 지평선으로 해가 지는, 이 아름다운 대지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 게 꿈이다. 한국의 전문인들이 은퇴한 뒤 그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 쓴다는 게 너무 아깝다. 노후를 행복하게 보낼 길이 무궁무진한데…. ‘가진 자’ ‘배운 자’ ‘아는 자’가 나누지 않으면 이 세상은 결코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김청자 약력
▼음반 ▽헬무트 도이치 반주 독일가곡집 ▽한국가곡 김청자애창곡집 ▽성가모음집 ‘더 높은 곳을 향하여’ ‘감사의 노래’ ‘사랑의 신비’ ▽독일가곡 181곡, 슈베르트 가곡 200곡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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