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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命]권노갑 회고록정동영과의 만남

입력 | 2014-03-22 03:00:00

정동영에 서울출마 권했더니… “전주로 보내주십시오”




올 1월 민주당 김한길 대표 초청 상임고문단 회의. 사진 왼쪽부터 정동영, 박상천, 권노갑, 문재인, 김 대표, 김상현, 이용희 고문. 동아일보DB

○정치 입문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3월경이다.

어느 날 월간중앙의 고도원 차장이 내게 만나자는 전화를 걸어왔다. 고도원 차장은 당시 MBC TV 앵커로 활동하던 정동영 씨가 정치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좀 도와주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왔다. 정동영 씨는 고도원 차장과는 전주고 동창이었다.

그 후 나는 정동영 앵커를 신라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 무렵 나는 김대중 총재의 뜻에 따라 15대 총선에 내보낼 참신한 인물들을 물색 중이었다.

“어디서 나가려고 하는가?”

“전주입니다.”

“그래?”

“꼭 좀 도와주십시오.”

“자네 뜻은 알겠지만 지금 전주엔 장영달 의원하고 오탄 의원이 있어. 그 사람들이 자네가 전주에서 출마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전전긍긍할 테고 잡음도 나게 될 거야. 그러니 자네 일은 연말에 있을 공천심사 때 정식과정을 밟아서 방법을 모색해보기로 하세. 그때까지는 어디다 발설하지 말고.”

그 후 공천심사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정동영 앵커의 문제를 김대중 총재에게 들고 갔다. 그러자 김대중 총재는 정동영 씨가 TV 앵커로 얼굴이 널리 알려졌으니 서울에서 한 번 나가보도록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정동영 앵커에게 꼬마민주당 이부영 의원의 지역구였던 서울 강동갑에 출마해볼 것을 권유했다.

“자네가 거기서 이기게 된다면 대번에 2∼3선의 중진급 의원과 같은 이미지가 쌓이고 관록도 붙게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 국민회의에 큰 도움이 돼.”

나는 당시 유재건 변호사도 당에 영입했다. 그는 전국구를 희망했지만 나는 그가 성북초등학교를 나온 서울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꼬마민주당 이철 의원의 지역구였던 성북구에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 우리는 아주 적극적으로 밀었고 유재건 변호사는 결국 15대 총선에서 이철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정동영 앵커도 그런 식으로 서울에 출마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동영 앵커는 전주로 가겠다고 완강히 고집했다. 난처한 일이었다. 나는 궁리 끝에 조직강화특위 위원들에게 “내가 물갈이 차원에서 정동영을 입당시켰다”고 포석을 친 다음 김상현 의원을 불렀다.

“이번 총선에서 100% 현역 의원만 공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소위 지방정서라는 것도 있지 않느냐? 국민회의를 일신하기 위해서는 호남지역부터 물갈이를 해야 한다. 장영달 의원과 오탄 의원은 당신 계보이니 둘 중에 하나를 양보해라.”

이렇게 중재하여 나는 정동영 씨에게 어렵사리 지역구를 마련해 주었고, 마침내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나는 갓 당선된 그가 국민회의 대변인이 되는데도 뒤에서 일조했다.


○최고위원 경선


그런데 16대 총선이 끝난 2000년 6월경인가 재선된 정동영 의원이 평창동 집으로 나를 찾아와 다짜고짜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겠다고 했다. 이때 김민석 의원도 같이 왔다.

“정 의원 생각은 알겠지만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게 좋지 않겠나? 당에는 사무총장과 원내총무, 정책의장의 당3역도 있고, 다선 의원과 원로들도 있는데, 대변인 한 번 한 것밖에 없는 정 의원이 중간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건 모양이 좋지 않다. 두루두루 당 엘리트 코스를 거친 후에 출마해도 늦지 않으니 잘 생각해보라.”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정동영, 김민석 의원은 일단 수긍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일주일 후 다시 찾아와 지금 당내에서 자기를 돕겠다는 사람들이 출마하라는 분위기이니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민주당은 호남당이 아닌 전국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정대철 박사, 경기도 인천에서 안동선 의원, 경북 대구에서 김중권 씨, 충청권에서 이인제 의원, 호남에서 한화갑·박상규 의원, 여성계에서 추미애 의원, 그리고 청년층에서 김민석·김근태·정동영 의원 등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최고위원들이 여러 명 나오는 게 당을 위해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정 의원의 뜻이 정 그렇다면 소장파 의원들의 몫으로 나가라고 했다.

나는 그 후 정동영 의원을 불러 “준비는 잘 되어 가나? 경선을 하자면 이런저런 비용도 들 테니 이걸 보태 쓰게”하고 2000만 원을 지원해 주었다.

당초엔 나 자신도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할 생각이었지만, 대통령의 뜻도 그렇고 당 발전을 위해 경선에 출마하지 않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로 결심한 터였다. 왜냐하면 동교동계인 한화갑 의원이 출마하겠다는데, 다시 내가 출마하게 되면 다른 지역 출신이나 계층에서 누군가는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동교동계가 당을 장악하는 모습이 되어 전국정당을 지향하고 있는 당의 화합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선으로 물러난 나는 경선에 출마한 후보들에게 골고루 표가 갈 수 있도록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하면서 앞으로 차세대 지도자를 키워야 한다는 뜻에서 청년층 대표로 출마한 정동영, 김근태 후보에게만은 특별히 2000만 원씩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준 돈은 내 개인 돈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그만 잡음을 일으키고 말았다. 돈을 받은 두 사람 중의 하나가 그 사실을 발설했기 때문이다.  

▼ ‘입지전적 판사’ 오탄의 눈물… ‘운동권 전설’ 심재권의 희생 ▼
1996년 15대 총선 정동영-추미애 당선 뒤엔…


1996년 15대 총선은 DJ(김대중)가 대통령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정계 은퇴 선언까지 뒤집고 네 번째 대선에 도전하는 DJ로서는 새로운 인물들을 영입해 ‘뉴 DJ’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새로운 수혈을 위해서는 ‘어제의 동지들’을 희생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정동영 앵커가 고향을 고집하는 바람에 지역구를 빼앗긴 오탄 의원(13, 14대·작고)만 해도 그랬다. 비록 당내 비주류인 ‘김상현 계보’였지만, 전북 부안농고와 전북대 법대를 졸업하고 판사를 지낸 오탄의 입지전적 경력을 권노갑 고문은 높이 평가했다. 성품도 강직했다. 권노갑은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그때 그렇게 영입한 인물들이 신기남, 정동영, 정동채, 정세균, 천정배, 추미애 같은 정치인들이었다. 추미애에게 서울 광진을을 주기 위해서는 심재권(16, 19대 의원)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당 정책위부의장을 맡고 있던 심재권은 사무실까지 내고 광진을에 출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천하의 심재권이 그거 하나 양보하지 못한다는 말이냐?” 그런 말까지 하며 심재권을 강동을로 돌렸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심재권이 강동을에서 맞붙어야 할 상대는 3선에 초대 환경부장관까지 지낸 신한국당 김중위 의원이었다.

심재권은 ‘피보다 진한 동지애’를 함께 나눈 사이였다. 1980년 DJ가 신군부에 연행되고,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권노갑이 의지한 유일한 동지가 바로 심재권이었다. 1970년대 서울대 학생운동권의 ‘전설’이었던 심재권은 당시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선생, 그리고 DJ가 이끌던 ‘민주회복민족통일국민연합(국민연합)’의 상임위원 겸 홍보국장을 맡고 있었다.

“심 동지는 학생소요의 배후조종자로 수배 중이어서 나보다도 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심 동지에게 광주 민주 항쟁을 전 세계에 알리고 김대중 선생 구명운동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좋습니다.’ 심 동지가 선뜻 응해주었습니다. 당시 33세였던 심 동지는 글자 그대로 열혈남아의 기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서 시종 불꽃이 튀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죽을 곳을 찾은 것 같습니다.’ 심 동지가 비장하게 말했습니다.”(권노갑의 1999년 회고록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에서)

심재권은 결국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감옥살이를 하고 만다.

권노갑은 “그때만 해도 심재권은 윤보선 대통령 자택에서 함석헌 선생, DJ와 함께 무릎을 맞대고 회의를 하는 청년대표였지만, 나는 문밖에서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김대중 선생 비서에 불과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 추미애는 당선됐지만 심재권은 떨어졌다. 15대에 대거 진출한 ‘DJ 키즈’의 영화(榮華) 뒤에는 그런 희생들이 있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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