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1939∼ )
남들도 다 그런다하기 새 집 한 채를 고향에 마련할 요량으로 그림을 그려가다가 늙은 아내도 동참시켜 원하는걸 그려보라 했더니 빈 하늘에 빨랫줄 하나와 원추리랑 채송화가 피는 장독대가 있는 집이면 되었다고 했다 남들이 탐하지 않도록 눈에 뜨이지 않게만 하라고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실용(實用)도 끝이 있구나! 나는 놀랐다 내 텅빈 실용 때문에 텅빈을 채우려고 육십 평생을 소진했구나 아내의 실용이 바뀌었구나 눈물이 한참 났다 이제야 사람 노릇 좀 한번 하려고 실용 한번 하려고 나는 실용의 그림들을 잔뜩 그려 넣었는데 없는 실용의 실용을 아내가 터득했구나 눈에 뜨이지 않게까지 알아버리다니 다 지웠구나 나는 아직 그냥 그탕인데 마침내 일자무식(一字無識)으로 빈 하늘에 걸린 아내의 빨랫줄이여! 구름도 탁탁 물기 털어 제 몸 내다 말리는구나 염치없음이여, 조금 짐작하기 시작한 나의 일자무식도 거기 잠시끼어들었다 염치없음이여, 또다시 끼어드는 나의 일생(一生)이여 원추리 핀다 채송화 핀다
화자는 노년을 지낼 그럴싸한 시골집을 고향에 마련할 생각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그림 같은 집을’ 어떻게 지어볼까. 꿈에 부풀어 이렇게 저렇게 집을 설계하다가, 거기 같이 살 ‘사랑하는 우리 님’ 의견도 청해보니 ‘빈 하늘에 빨랫줄 하나와 원추리랑 채송화가 피는 장독대가 있는 집’이면 된단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