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통일코리아 프로젝트 2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 [탈북자에서 한국인으로]<2>프로축구 제주 유스팀 김창준군
제주 유나이티드 U-18(유스팀) 소속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창준 군이 팀의 홈구장인 서귀포 걸매구장에서 슛을 날리고 있다. 국가대표가 꿈인 김 군은 “축구를 통해 북한에서 온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제주=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비행기를 탈 수 있다면, 텔레비전에 한번 나올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공상일 뿐이었다.
소년은 학교 선배들을 따라 가족 몰래 공차기(축구) 경기에 나간 적이 한 번 있었다. 축구는 그를 매료시켰지만 그 경기 후 공차기를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소년에겐 운동화도, 축구공도 없었다.
“꿈이 없었어요.”
김창준 군(18)은 북한 생활을 이렇게 떠올렸다. 김 군의 어머니는 먹고살기 어려워지자 김 군을 데리고 2005년 탈북했다.
“처음엔 그저 이제 실컷 먹을 수 있겠구나 생각뿐이었어요. 한국은 어디인 줄조차 몰랐죠.”
소년은 한밤에 동남아 국가의 국경을 넘어야 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진흙에 발이 빠졌고 군인들의 서치라이트가 어지러이 들판을 갈랐다. 소년이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였다.
한국에 도착해 서울 마포구에 정착한 다음 날은 소년의 인생을 바꾼 일요일이었다.
엄마와 교회 운동회에 간 김 군은 신나게 공을 찼다. 이를 눈여겨보던 교회 집사가 말을 걸어왔다. “너, 축구해볼 생각 없니?”
김 군은 왠지 모를 의욕이 솟아났다. 집사는 친분이 있는 서울 강남의 구룡초등학교 김영곤 감독을 소개했다. 어머니도 “네가 정 하고 싶으면 도전해봐라”고 허락했다.
“기본기가 전혀 없었어요. 볼 리프팅(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다루기) 5개도 못했죠. 감독님이 다른 아이들을 혼내면서도 저는 실수해도 혼내지 않는 거예요. 처음엔 ‘나를 싫어하는 건가’ 생각했죠.”
○ 축구가 밝게 바꿔놓은 인생
자기도 모르게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있었다. 새벽엔 학교에 나와 조기축구 아저씨들과 공을 찼다. 설날에도 혼자 눈 쌓인 운동장에서 숨이 찰 때까지 달리고 훈련했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리프팅을 300개 할 수 있었고 팀 주장을 맡은 6학년 때는 1000개를 했다.
실력을 인정받은 김 군은 서울의 축구 명문 동북중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때 우리 팀에 항상 이기던 강팀에서도 제일 잘하는 친구들만 왔더라고요.” 김 군 주변에선 ‘네가 경기에 나갈 수 있겠나’는 걱정을 했다.
그때 박지성 선수의 ‘멘털’을 떠올렸다. “박 선수는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으로 갈 때 ‘잘하는 선수가 많아 5분, 10분만 기회가 오더라도 노력해 선발 기회를 얻겠다’고 했어요. 저도 그 정신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기회가 많이 왔어요.” 그는 주말에도 쉬지 않고 혼자 연습했다.
동북중 2학년 때 유소년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그해 서울시 축구협회장배 대회에서 동북중이 우승하며 김 군은 최우수선수상까지 받았다.
그해 유소년 국가대표팀이 중국에서 열린 국제 친선경기에 참가했을 때, 김 군은 북한 팀과 맞붙었다. 한눈에 열악한 환경에서 훈련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착잡하고도 묘한 마음이 들었다. 경기는 3-0으로 이겼다.
○ 대한민국 국가대표 태극마크를 향하여
김 군은 현재 프로축구팀 제주 유나이티드의 고교팀(방통고)인 U-18(유스팀)의 선발 오른쪽 수비수(사이드백)로 활약하고 있다. 이 팀은 프로축구팀 소속인 21개 고교팀이 참가하는 ‘K리그 주니어’에 출전한다. 우수한 고교 선수들만 참가하는 리그다.
팀 설동식 감독의 말이다. “창준이는 오버래핑(수비수가 공격에 가담하는 능력)과 경기를 잘 풀어가는 넓은 시야, 성실성과 지구력이 말할 수 없이 좋은 산소탱크예요. 후배와 동료에게 힘을 넣는 리더십도 좋아서 어느 프로팀에 가도 상당한 기여를 할 겁니다.”
김 군은 “축구선수로 생활하며 탈북자 출신이라는 주변의 선입견을 한번도 느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히려 미래와 꿈에 대해 얘기하다 제가 얘기를 먼저 꺼내면 친구들이 공감하며 ‘잘 왔다. 더 열심히 하자’고 격려해줬고 그게 제게 큰 힘이 됐습니다.”
김 군의 목표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태극마크를 가슴에 다는 것이다.
“북한에 있었다면 꾸지도 못했을 꿈을 한국에서 찾고 하나하나 이뤄가고 있습니다. 신기하고 기적 같은 일이에요. 이영표 선수처럼 조용하고 묵묵하게 동료 선수들을 이끌며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9년 전 비포장 길을 걸으며 공상으로 외로움을 달랬던 소년은 꿈과 미래를 향해 달리는 축구 유망주로 성장해 있었다.
“한국에 와서 비행기도 타고 통일부 공익광고에도 출연한 적 있으니 어린 시절의 공상도 이뤄진 셈이네요. 축구로 꿈을 이뤄가며 북한에서 온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얼마든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어요.”
제주=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