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우우 일어서는 풋연두 보리풀싹
‘도루코 면도날이 지나간 자리처럼/잘 다듬어진 잔디밭은/내 발길을 머뭇거리게 하거나 돌려세우고 만다/그러나 몇날 며칠 깎지 않은 수염처럼/거칠고 꺼끌꺼끌한 보리밭을 지날때면/옛남자를 본 듯 반갑고 가슴뛴다(박이화 시인)’. 언 땅 뚫고 푸른 숨소리 일렁이는 풋연두바다 고창 청보리밭.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졸졸졸 얼음장 밑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개굴개굴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버들강아지 기지개 켜는 소리도 들린다. 고창=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壯紙에 그리니
육자배기 들린다
풋연두 일렁이는 보리밭
붉은 黃土色紙 사이
배꽃 흰 구름 언덕
뭉게뭉게 넘는 길
모든 길이 노래더라
―<김선두 ‘모든 길이 노래더라’ 全文>
여린 보리싹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부르르 가늘게 몸을 떨었다. 붉은 황토밭에 풋연두 어린 것들이 구물구물 잔물결을 일렁였다. 남도의 육자배기 소리가 낮고 유장하게 들리는 듯 했다. 물도랑가의 버들강아지에 풋물이 탱탱 불어터졌다. 밭두렁엔 자잘한 개불알꽃이 별똥별처럼 금싸라기로 피었다. 그 옆엔 여린 쑥들이 벌 떼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벼는 양(陽)이요, 보리는 음(陰)이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보리는 익어도 빳빳하게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다. 식품학자 유태종 박사는 “벼는 양이기 때문에 음인 흙을 그리워하고, 음인 보리는 양인 하늘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늘을 까치발로 꿈꿔서 그런가. 겨울보리는 달뜬다. 땅이 얼었다 녹았다, 서릿발이 일어나 뿌리가 붕 뜬다. 지그시 밟아줘야 한다. 곡식이나 사람이나 웃자라면 거들먹거리기 마련이다. 오만방자해진다. 아무리 머리는 봉황의 꿈을 꾸더라도, 두 발은 땅에 굳건하게 딛고 있어야 한다.
진영호 청보리밭 주인장(학원농장 대표)은 “옛날엔 사람들이 일삼아 밟아 줬지만 요즘엔 농촌에 사람이 없어 그럴 여건이 못 된다. 트랙터 뒤에 테니스장에서 바닥을 다질 때 쓰는 롤러 같은 돌을 매달아서 활용한다. 그걸 달고 청보리밭을 왔다 갔다 하며 들뜬 보리를 눌러준다”고 말했다.
‘풀을 밟아라/들녘에 매 맞은 풀/맞을수록 시퍼런/봄이 온다/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풀을 밟아라/밟으면 밟을수록 푸른/풀을 밟아라’ (정희성 ‘답청’ 全文)
보리는 대나무처럼 속이 비었다. 마음을 비워 더욱 꼿꼿하다. ‘세상 옳게 이기는 길/그것은 바로/바르게 서서 푸르게 생을 사는/자세에 있다’(이재무 시인)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1960년대 보릿고개(4, 5월) 때는 모두가 허기져 어지러웠다. 아이들 얼굴은 누렇게 떴다. 아이들은 익지도 않은 청보리를 보릿대째 뽑아다가 모닥불에 구워 먹었다. 불에 익은 풋보리를 손바닥으로 비빈 뒤 후후 불어, 그 말랑말랑하고 고소한 풋알갱이를 입에 넣었다. 저마다 입가에 검댕이 묻어 부엌강아지 같았다.
고창읍 죽림리 고인돌밭에도 봄볕이 자르르하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삶의 흔적. 모두 447기가 흩어져있다. 탁자모양의 북방식, 그냥 맨땅 위에 솥처럼 얹혀져 있는 남방식, 두 가지가 혼합된 절충식 등 고인돌 백화점이라 할 수 있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어른들은 이곳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거나, 심지어 고인돌을 식탁삼아 음식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선운사 동백꽃은 이제야 붉은 꽃심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영락없이 ‘열리기 직전의 빨란 립스틱’이다. 4월 중순께나 가야 흐드러진 핏빛 꽃을 볼 것 같다.
미당 서정주 시인(1915∼2000)의 고향마을 고개 질마재는 여전히 조붓하고 호젓하다. 고개 아래 곰소만이 거무튀튀하고 아슴아슴하다. 젓국물처럼 곰삭은 바닷물, 여기저기 굵게 파인 갯벌, 그 위에 내팽겨진 폐선, 쪼글쪼글 할머니 젖 같은 갯골….
‘세상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소나무에 바람소리 바로 그대로/한숨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지붕 우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서정주 ‘질마재의 노래’에서)
▼ ‘청보리밭 푸른 꿈’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죠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농장’을 꿈꾸는 진영호 대표.
진영호 학원(鶴苑)농장 대표(66)는 전형적인 농부 인상이다. 해맑고 부드러운 얼굴에 말씨도 낮고 조용하다. 그는 진의종 전 국무총리(1921∼1995·재임 1983.10∼85.02)의 장남이다. 어머니 이학 여사(1922∼2004)도 궁체한글서예와 전통 자수로 유명했던 분이다. 학원농장(063-564-9897)의 ‘鶴(학)’도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온 것. ‘학원’은 ‘두루미가 노니는 뜰’이라는 의미다(www.borinara.co.kr).
1971년 진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곳에 내려와 꿈을 펼쳐보려 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했다. 하는 것마다 절벽이요, 산 너머 산이었다. 결국 1년여 만에 보따리를 쌌다. 그리고 1973년 금호실업에 들어가 20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다. 동료들 중에서 선두로 이사까지 승진해서 잘나갔다. 하지만 92년 봄, ‘이젠 내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미련 없이 접고 이곳에 내려왔다. 다들 ‘미쳤다’고 했다. 다행히 부인 나란희 씨(63)는 담담하게 ‘숙명처럼’ 받아들여줬다. 아버지 어머니는 ‘대환영’이었다.
“금호에 있을 때 5년 동안 일본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일본 농촌을 의도적으로 많이 찾았다. 당시 일본 농촌에선 관광농원과 펜션 등이 떴는데,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유럽출장을 갈 때마다 그곳 선진농업을 눈여겨 살펴본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동안 우여곡절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주위에선 ‘경관농업 좋아하네!’라며 비웃음도 적지 않았다. 겉만 번지르르하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이제야 겨우 자리를 잡은 느낌이다. 여기 청보리밭은 100만여 m²(약 35만 평) 정도 되는데 학원농장 것이 15만 평쯤 된다. 나머지는 이웃마을 주민들 소유다. 점점 동참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
청보리밭축제는 2004년부터 시작했다. 지난해 ‘청보리(4∼5월)-해바라기(7∼8월)-메밀축제(9∼10월)’를 찾은 사람은 100만여 명(청보리 50만, 해바라기 20만, 메밀 30만 명)에 이른다. 진 대표가 꿈꿨던 ‘경관농업’이 드디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땅심’문제가 바로 그렇다. 같은 땅에 같은 작물을 계속 심으면 땅이 허해진다. 그러면 작물이 고르게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보리수확은 하되 보릿대는 땅에 갈아엎어 거름으로 쓴다. 보통 농가에선 보릿대를 가축사료로 활용하는 것과 다르다. 문제는 해바라기나 메밀.
“앞으로 돌아가면서 휴경지를 둬볼 생각이다. 가장 힘든 건 때를 맞추는 것이다. 가령 해바라기가 영글 때까지 기다리다보면 메밀 심을 때를 놓치게 된다. 또한 이상기후 때문에 보리가 늦게 익기라도 하면 해바라기 파종시기를 놓친다. 지난해엔 메밀밭에서 껑충 큰 해바라기가 자라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휴경지에 유채꽃을 심었다가 갈아엎어 ‘땅심’을 키우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 꽃도 보고, 땅도 기름지고…. 어쩌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Travel Info
▼교통 ▽기차=서울 용산-정읍(정읍에서 시외버스 이용 고창행 30분 소요) ▽고속버스=서울강남터미널-고창(3시간 소요) ▽승용차=서울-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공주당진고속도로-서해안고속도로-고창나들목
▼먹을거리 ▽장어 강나루(063-561-5592), 우진갯벌풍천장어(063-564-0101) ▽송사리탕 인천장가든(063-564-8643) ▽굴비백반 서해안식당(063-563-3345) ▽바지락죽 본가(063-561-5881) ▽시래기해장국 선운식당(063-561-1960) ▽바지락밥 미향(063-564-8762)
▼숙박 ▽선운산 골든캐슬(063-563-3756, 010-5323-0010) ▽선운산유스호스텔(063-563-3445) ▽축령산휴림(010-4606-4481) ▽오토캠핑리조트(063-562-3318)
♣웰파크시티=가족형 골프장, 황토펜션, 게르마늄 스파, 병원, 실버타운 등을 갖춘 대형 워터파크. 승마장, 편백나무 숲길, 자전거길 등이 있으며 장기투숙하며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다. 063-560-7500
♣고창군청 문화관광과 063-560-2457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