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1호를 만나다]<8>스턴트우먼 조주현 씨
《 “야, 태국 애들 다 잘리고 네가 온 건데 잘해야지.” 동료 스턴트맨의 한마디에 다시 한 번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솟아올랐다. 오른쪽 다리가 욱신욱신 쑤셨다. 텀블링과 발차기가 연결된 동작이었다. 관객이 재미가 있으려면 동작이 느리면 안 된다. 액션 장면이 빨리빨리 전환되면서, 컷 사이로 ‘진짜 주연’들 얼굴이 들어가야 관객들이 손에 땀을 쥐며 보게 된다. 스턴트우먼 조주현 씨(44)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동선이 그려졌다. ‘발차기 다음에 왼쪽 40도 방향으로 텀블링, 또 텀블링, 그리고 발차기 마무리다!’ 조 씨가 지난해 11월 일본 영화 ‘루팡 3세’를 찍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다 바지를 걷어 올렸다(‘루팡 3세’는 일본 톱스타 오구리 슌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 국내에서도 올해 개봉할 예정이다). 종아리 곳곳에 짙은 핏빛 상처가 남아 있었다. “다리 근육 모세혈관이 다 터진 거예요. 병원 가겠다고 하면 촬영에 큰 지장을 줄 상황이어서 아픈 것도 참았어요.” 》
14일 경기 파주시의 한 야산에서 오토바이 스턴트 장면을 연습 중인 조주현 씨. 평소 다른 사람의 대역으로 얼굴을 돌린 채 액션만 촬영했지만 이날만큼은 당당히 얼굴을 드러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김치 국물에 밥 먹으며 배운 기계체조
조 씨가 처음부터 스턴트우먼은 아니었다. 고교 졸업 후 에어로빅 강사로 활동했는데, 다리를 양옆으로 쫙 찢거나 발을 위로 쭉쭉 뻗어 올리는 고난도 동작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지인이 깜짝 놀라며 그녀를 영화촬영 현장에 소개했다. 첫 작품은 1993년 어린이 액션영화 ‘용호의 권’. 그녀의 현란하면서도 유연한 액션 장면을 본 제작진이 스턴트우먼으로 일해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것을 받아들이면서 운명이 바뀐다.
당시 그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진짜같이 리얼하게 계단에서 구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궁리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구르면서 신발이 벗겨지도록 해달라는 감독의 주문이 있으면, 구르기 시작할 때 신발을 툭툭 허공으로 뿌리는 경지까지 이르게 된 것. 이제는 아예 촬영 전에 “가방이 어느 지점에 떨어지게 구를까요”라고 물을 정도다.
교통사고 장면을 찍을 때 대역이 많이 동원되는 만큼 그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머릿속으로 ‘연구’를 했다. ‘승용차 범퍼 높이가 이 정도니까, 내가 다리를 오른쪽으로 들면…이때 차 위로 올라가면서 몸을 창문 위로…조명과 카메라가 오면 내 얼굴이 보이지 않게 이쪽으로 굴러보면….’
드디어 1998년 ‘투캅스3’에서 주연배우 권민중을 대신해 남자 범인을 한 방에 제압하는 장면을 소화하면서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올랐다.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알린 것은 2003년 드라마 ‘다모’를 찍으면서부터다. 주연배우 하지원의 대역으로 공중을 날아다니며 시원한 액션 장면을 선보였다.
현재 대중이 기억하는 대다수 영화·드라마의 여성 액션 장면은 그가 다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중천’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김태희,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어둠을 가르고 날아올라 상대의 쇄골을 가격하는 ‘니킥’도 그의 무술연기가 쓰였다. TV드라마 ‘시티헌터’에서는 여자경호원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내 나이 44세… 아직은 현역 자신있어
주원과 설리 주연의 영화 ‘패션왕’ 촬영에서 조주현씨가 와이어 장면을 소화하고 있다. NEW 제공
“과거 여자 배역은 다 제가 했는데 이제 후배들도 제법 있어요. 요즘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누나,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 아프면 안 되니까 쉬어’라고 농담처럼 말하는데 그 말이 그렇게 서글프더라고요. 전 아직 잘할 수 있거든요.”
어느 날 ‘나이도 먹었는데 그만하지’라는 누군가의 말에 조 씨가 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자 분장 중이던 배우 하지원이 옆에서 천금같은 한마디를 던졌다고 한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가 앞으로도 계속 다 해. 언니가 대역을 해줘야 화면이 산단 말이야.” 조 씨는 ‘폰’ ‘다모’ ‘더 킹 투 하츠’ ‘기황후’ ‘조선미녀 삼총사’에 이르기까지 하지원의 출연 작품에서 고난도 액션 장면을 대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얀 옷을 더럽히지 않고 차에서 뛰어내릴 재간이 없었다. 결국 의상실로 달려가 간호사 옷을 갖고 나왔다. 같은 흰색이어서 길이를 비슷하게 수선해 입고 찍었다.
꿈은 중국 무대의 최고 무술감독
힘들게 작품을 찍어도 얼굴이 없는 그. 주연 배우에게만 공이 돌아가는 것이 싫진 않았을까. 그의 말이다.
“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합니다. 땀범벅이 되어도 내 얼굴은 어차피 안 나오니까 오히려 더 열심히 액션 장면에 몰입해 찍을 수 있지요. 얼굴이 나오는 정극 연기도 해봤는데 제 길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도 자신이 주연인 영화를 찍었다. 2011년 배우들이 액션까지 다 소화한 ‘패는 여자’를 찍었는데, 김춘식 감독에게 구박을 받았다. 김 감독은 그녀의 남편이기도 하다. 조 씨는 “하도 냉정하게 연기 지적을 해서 ‘이 영화만 끝나면 당장 이혼한다’고 벼르기까지 했다”며 웃었다.
스턴트 배우라고 해서 몸만 쓰는 것은 절대 아니다. 대본을 철저하게 숙지해야 한다. 스토리와 역할에 따라 배우의 액션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 여러 작품을 동시에 찍을 때는 밤새도록 대본 3개를 읽은 적도 있다. 이런 실력들이 쌓여 영화 ‘자칼이 온다’에서는 무술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줬다.
그의 꿈은 ‘편집을 잘하는’ 무술감독이다. 요즘은 편집을 방송국이나 영화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무술감독들이 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일본과 중국, 대만에서 한국무술팀에 대한 수요도 많아졌다. 계기는 영화 ‘올드 보이’ 덕분이다. 군만두만 먹으며 학대받던 최민식이 탈출 뒤 악당들을 처치하며 앞으로 나가는 롱 테이크 장면이 있는데, 조 씨의 사부인 양길영 무술감독이 지휘했다. ‘올드 보이’를 본 후 외국 영화사들의 액션 연기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한 것.
조 씨는 “한중일 액션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일본은 사무라이 영화 위주여서 칼싸움 신이 많고, 중국 액션은 좀 과장되어 있다. 한국 액션이 가장 현실에서 싸우는 장면처럼 보인다고들 한다. 그는 영화시장이 넓은 중국에서 무술감독으로 성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스턴트우먼을 꿈꾸는 여성이 늘었다고 한다. 물론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사실 영화 현장에서 여자 스턴트 배우라고 해서 차별은 별로 없었어요. 떨어져서 보는 사람들이 ‘신기하다’고 느낄 뿐이죠. 다만 스턴트우먼을 하고 싶다면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넘어지는 대역 수준만 하면 되겠지’란 마음가짐으론 안 됩니다. 말도 타고, 다치마와리(격투 액션), 낙법도 할 줄 알아야 해요. 몸도 마음도 강인한 프로가 돼야 합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