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임금 미루고 떼먹고… 사장님 나빠요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희망 주는 한국… 정치는 아리송, 교육-건보 혜택은 대만족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우리에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한국에 온 건 고향에 돌아온 것과 같다. 한국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을 받고, 교회에서 주는 밥 먹으며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다. 그런데 한국이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건 나 혼자의 착각인가.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나쁜 짓하고서 얼마든지 튈 수 있는 외국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67·무직)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중국에 이주했다. 최근 온 가족이 다시 한국으로 왔다. 경상도에 연고지 호적이 있었고 동포 2, 3세라 영주권을 받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끼리만 통한다. 한국인과 접촉할 일이 별로 없다. 누나도 최근 중국동포와 결혼했다. 젊은 사람들이 몰리는 서울 강남이나 명동에 가면 특히 차별을 많이 느낀다.(32·일용직 노동자)
―요즘 개그콘서트에서 조선족의 보이스피싱을 비꼬는 코너(‘황해’)를 우린 그냥 웃으면서 본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우리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심어주는 부작용이 있다. 우리의 억양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표현한다거나 조롱하는 경우가 많아 불편하게 느끼는 친구도 많다.(28·중소기업 근무)
―얘기만 몇 마디해도 억양에서 티가 나기 때문에, 현장 감독들이 차별 대우한다. 예를 들어 같은 말이라도 내국인에게는 부드럽게 하는데 우리에게는 괄시하는 말투로 하곤 한다. 이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중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괄시를 받는 것 같다.(57·일용직 노동자)
―부모님은 경북 영주시 풍기면에서 태어났고,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옮겨갔다.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한국 역사와 지명을 잘 익혀두라고 열성적으로 가르치셨다. 우리 가족 고향은 한국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난 내가 뼛속까지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 공원에서 “한국인도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공원에서 노느냐”라고 시비를 거는 내국인을 만났다. 정말 속상했다.(51·노점상)
밀린 월급 주세요
―공원에 가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중국동포가 많다. 하루 종일 집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공원에라도 가는 거다. 그런데도 집값은 꼬박꼬박 나가니 평소에 허리띠를 바짝 죄어도 돈 모으는 게 힘들다. 게다가 같은 일을 해도 내국인들이 200만 원 받을 때 우리는 170만∼180만 원밖에 못 번다.(57·일용직 노동자)
―10년 전 한국에 정착했다. 손자를 포함해 네 가족 생활비가 월 120만 원 정도다. 나와 아들이 일용직을 하고 며느리는 식당에 나가 버는 돈만으로는 빠듯하다. 초등학교 다니는 손자 키우는 것도 걱정이다. 당장 군것질 비용도 대지 못한다. 내국인 자녀들과 비교했을 때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 같다.(60·일용직 노동자)
―한국 사장님들, 임금 체납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중국에서도 비록 적지만 임금만큼은 제때 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내일 주겠다는 말만 반복하다 떼먹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고소나 고발을 해도 실제로 떼인 임금을 받아내기 어렵다. 어찌어찌 고소를 해도 근무 장소였던 지방까지 오가느라 하루를 공친다. 그러니 울며 겨자 먹기로 밀린 일당을 포기한다.(65·일용직 노동자)
―한국에 온 지는 12년 정도 됐다. 중소기업 부품회사나 건축 등의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만 보면 ‘거지가 돈 벌러 왔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도 중국에 있을 때 집 있고 차 있고 하던 사람들이다. 여기 기준으로 가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멸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우린 더 좋은 삶을 찾아서 온 것일 뿐이다.(65·중소기업 근무)
―가족이 모두 한국에 있는데도 죄다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게 괴롭다. 아들과 며느리는 부산에서 따로 살며 일한다. 유치원에 다니는 여섯 살 난 손자는 여기 서울에서 키우는데 아무래도 교포다 보니 육아보조금이나 지원금은 기대도 못하고 있다. 지금은 그럭저럭 키우는 데 애가 더 컸을 때를 생각하면 걱정이 많다.(65·중소기업 근무)
까다로운 비자 발급조건 완화해줬으면
―물탱크 청소 같은 막노동일로 일당 9만 원을 받으면서 산다. 일이 없는 봄, 가을에는 4만∼8만 원짜리 녹음기, 책을 파는 노점으로 생계를 꾸린다. 하루 종일 못 팔아도 중국에서 사는 것보단 낫다. 중국 국적이지만 난 한국인이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60·일용직 노동자)
―식당가에서 월 80만 원 받던 아르바이트로 시작해서, 아이를 낳고 그만두기 전까지 식당일을 오래 했다. 한국은 돈 없으면 살기 힘든 각박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도 자녀 교육이나 복지 분야는 좋다. 아이가 건강이 안 좋은데 학교에서 돌봄반을 만들어 특별히 많이 도와준다. 한국에서 태어난 덕분에 건강보험 혜택도 생겨 치료비가 많이 안 나가 도움이 된다.(45·여·전업주부)
―한국에 정착한 지는 6, 7년 정도 됐다. 자식 내외의 생활이 중국에 살 때보다 많이 좋아졌다. 친척들이 한국에 있어서 돌아오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자식들을 보기 위해 2003년에 왔을 때만 해도 적응이 안 돼 불편했다. 지금은 아주 좋다. 주변 환경이 깨끗하고 서비스나 아이들 교육이 특히 맘에 든다.(79·여·무직)
―한국에 와서 제일 신기했던 게 노조 파업과 여야 정치인들의 싸움이었다. 중국에서는 그런 건 바로 총살이다. 물론 여러 의견을 내는 건 좋지만, 지도자가 뭔가 하려고 하면 지지해줘야 하는데 서로 물고 뜯고 하느라 제대로 정책을 못 세우는 것 같다. 같은 민족끼리 왜 그렇게 싸우는지 안타깝다. 이런데 북한이랑 통일? 못 할 거다.(57·일용직 노동자)
―요즘 현장에 나가면 한국 사람들이 없어서 교포들이 다 일을 한다. 그렇다 보니 우리도 기술이 있으면 노력한 만큼 돈도 더 받고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한국 사람들이 다 빠져버린 산업분야에서 기술이 있으면 먹고사는 데는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다.(65·중소기업 근무)
―한국 상시체류가 가능한 ‘재외동포 비자(F-4 비자)’ 발급 조건이 미국, 일본 동포에 비해 지나치게 까다롭다. 미국, 일본 동포는 부모나 조부모 중 한 명만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실만 증명하면 되는데, 우리에게는 학위나 기업체 대표(또는 임원), 기능사 자격증 등의 조건을 요구한다. 이를 시정해 달라.(49·중소기업 근무)
―F-4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면 ‘방문취업 비자(H-2 비자)’를 받아 들어온다. H-2 비자는 최대 4년 10개월까지만 체류할 수 있다. 그 후에는 출국했다가 다시 입국해야 한다. 3년마다 한국에서 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F-4 비자에 비해 많이 불편하다. H-2 비자는 중국과 옛 소련 동포에게만 제한적으로 발급한다고 알고 있다. 왜 우리에게만 이렇게 엄격한 것인가.(29·여·사무직)
―80대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초청돼 왔다. 난 H-2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직업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이가 너무 많아 직업교육을 못 받았고, 비자를 발급받지 못했으며 결국 불법체류 신세가 됐다. 연로한 부모에 대해 비자 제한을 완화해 줬으면 좋겠다.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데 여건이 안 돼 걱정이 많다.(55·여·무직)
※이에 대해 법무부는 “2013년 9월부터 60세가 넘는 동포들에게는 무조건 F-4 비자를 주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80대 어머니는 이 규정이 시행되기 전에 들어온 것 같다. 불법체류를 하더라도 자진해 나간 뒤, 재외공관에 F-4 비자를 신청하면 바로 받을 수 있다”고 답변해 왔습니다. 또 ‘다른 지역의 동포들에 비해 비자 기준이 엄격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중국 및 옛 소련 지역 동포들은 국내 취업 가능성이 훨씬 높은 만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대거 입국할 수 있어 기준을 달리 정했다. 그러나 꾸준히 비자 기준을 완화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