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1960∼1989)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근 25년 만에 기형도 시집을 다시 읽는다. 푸른, 누추한, 구름, 희망, 고통, 불안, 사랑, 청춘, 머뭇거리다, 헤매다, 저녁, 탄식, 죽음…. 이런 시어들이 구름처럼 시인 기형도 형상을 이루며 흘러간다. 내 세대 시인들에게 ‘우리들 청춘은 끝났다’는 고지(告知)이기도 했던 기형도의 죽음.
그를 묻은 날, 간소한 추도식에서 시인 하재봉이 송별사로 이 시를 읽었다. 그렇게 그는 청춘으로 남고 우리는 나이를 먹었다. 어떤 소설엔가 이런 구절이 있다. ‘죽은 사람은 외롭다. 아무도 그와 사귀려들지 않아.’ 기형도가 살아 있으면 킬킬 웃으며 이런 대구를 지었을 테다. ‘늙은 사람은 외롭다. 아무도 그와 사귀려들지 않아.’ 수많은 독자와 후배 시인이 그의 시를 사랑하고 사귀기 원하니 지금 기형도는 그리 외롭지 않으리라.
화자는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머뭇거리고 헤맨다. 몸은 지상에서, 영혼은 공중에서. 왜? 기형도에게 청춘의 화두랄까 상투어는 ‘사랑’이었던 듯하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나’ 그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인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그런데 사실 자기조차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는 자조와 탄식이 자욱하다. 질투밖에 허락되지 않은 사랑에 대해, 어떤 인생에 대해 젊은 시인에게 늙은 내가 들려줄 말이 있을 듯하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