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원 정치부 차장
2008년 현장에서 경험한 미국 선거는 언뜻 보기에는 ‘카오스’의 세계 같았다. 텍사스 주도(州都) 오스틴의 한 고등학교에서 치러진 코커스(당원대회)의 모습. 적어도 내겐 충격이었다. 유권자들은 이 교실 저 교실을 오가면서 밤늦게까지 토론을 거듭했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돼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일부 유권자들은 즉석에서 지지후보를 바꾸기도 했다.
6개월간 10여 개의 선거 현장을 취재하는 동안 기를 쓰고 각 주의 선거제도를 이해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미국에는 중앙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당 지도자들이 후보 선정에 직접 관여하지도 않는다는 대원칙만큼은 명확했다. 여론조사만으로 후보를 선정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유감스럽지만 우리의 선거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 잦다. 이번 6·4지방선거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서울지역 한 공천관리위원은 몹시 지쳐보였다. 예비후보들과의 활발한 토론 과정에서 피로감을 느낀 게 아니라 선거가 두 달여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경선규칙을 확정하지 못한 채 오락가락하는 당 지도부에 대한 실망감이라고 했다.
룰 전쟁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광역, 기초도 불문이다. 무골호인(無骨好人)처럼 보이는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3일간 두문불출했고, 7선의 정몽준 의원도 심야에 방영된 ‘핵이빨’ 타이슨의 17년 전 경기를 보면서 혈압이 올랐다. 다 규칙이 문제였다.
새누리당 깃발이 곧 당선을 의미하는 서울 강남구청장 선거도 진흙탕이다. 여성을 우선 공천해야 한다고 열흘 이상 야단법석이 벌어지더니 이번에는 전직 강남구청장 출신 2명이 모여 공천관리위원회가 불공정하다고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절반의 지분’을 인정받은 안철수 공동대표 측을 배려한다며 새로운 경선방식 만들어 내기에 골머리를 앓는다. 결국 구(舊)민주당 출신 예비후보만 있는 곳과 안철수 신당 쪽 예비후보가 있는 곳을 나눠 2원적인 규칙을 적용키로 했다. 일부 지역은 당원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니 참 고약한 특례규정이다.
하기야 100년 가는 정당을 만들겠다고 공약해 놓고 37일 만에 창당준비 단계에서 해산해 버리는 것이 우리 정치판 생리 아닌가. 선거규칙 바꾸는 것이야 여반장(如反掌)보다 쉽지 않았을까. ‘새정치’라는 대의명분이 있다는데 뭐가 두려울까.
“‘나눠먹기’가 본질인 정치에서 내 파이를 키우는 규칙만이 영원하다”는 한 정치인의 자조적 농담이 유난히 크게 들리는 요즘이다.
하태원 정치부 차장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