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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양섭 전문기자의 바둑人] 프로초단 딸에게 진다는 김성래 5단

입력 | 2014-04-04 16:34:00


바둑 책 출간과 해외 바둑 보급으로 유명한 김성래 5단. 요즘은 김채영 초단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래도 즐겁다. 윤양섭 전문기자lailai@donga.com

김성래 5단(51)은 바둑 보급으로 유명한 프로기사다. 바둑 책 출판에 힘을 쏟았고, 그 연장선상에서 해외에서 바둑 보급 활동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부녀기사로 더 유명하다. 그는 여류 강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김채영 초단(18)의 아버지. 권갑용-효진 부녀에 이어 두 번째 부녀기사다. 둘째 딸 다영 양(16)도 한국기원 연구생 2위로 머지않아 입단할 것이라는 게 주변의 기대다. 김 5단을 3일 서울 성동구 왕십리 육형제바둑문화센터에서 만났다. 그가 바둑판 제조업체인 육형제 바둑과 공동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마침 채영 양이 여류국수전 결승 2국에서 박지은 9단에게 이겨 1-1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다음날이어서 그 대국부터 물었다.

"당연히 보았지요. 제가 강원도에서 강의를 하고 오던 날이었는데 궁금해서 휴게소에서 쉴 때 휴대전화 앱을 통해 대국을 보았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직후 컴퓨터를 켜니 거의 종반이었습니다. 다른 일은 못하고 마음을 졸였습니다. 차라리 내가 두는 게 낫겠더라고요. 채영이가 박 9단과는 그 전에 두 판을 뒀는데 모두 졌어요. 그때는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결승 1국을 보니 충분히 이길 수 있었던 바둑이었어요. 2국을 두기 전에는 '3시간짜리 바둑이니 체력 안배를 잘하라'고 훈수도 했습니다(웃음). 이기고 나서는 가족들과 같이 저녁을 먹으며 격려도 했어요."

김성래 5단이 장녀 채영 양이 프로로 입단했을 때 업어주는 모습. 한국기원 제공

김 5단은 그러면서 "나를 닮아 그런지 채영이가 어렸을 때는 재주가 없는 바둑이었다"며 "커 가면서 끈기와 근성을 키운 것 같다"고 말했다.

"2004년경 양재호 바둑도장이 문을 열 무렵 사범으로 있었는데 그때 채영이를 다른 원생들과 가르쳤다. 처음에는 정선으로 두던 또래 아이들에게 6개월만 지나면 지는 경우가 많아 속이 많이 상했다. 그때 엄하게 해 바둑을 가르치려다 보니 채영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적도 있는 것 같다. 바둑 재주도 없어 보이고 내가 가르치는 것도 한계가 있어 채영이가 중학교 1학년 때에 '이제 바둑을 둘지 다른 것을 할지 네가 결정해라'고 했을 때 본인이 바둑을 하겠다고 했고, 그 이후에는 스스로 바둑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국기원 여자 연구생 시절에는 1집 차이를 줄이려고 1시간 이상 장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지도 사범이 약속이 있어 나가야 하는데도 바둑을 붙들고 있어 혼이 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때부터인지 바둑에 끈끈한 맛이 생겼다."

채영 양의 라이벌은 동갑내기 최정 4단이다. 최정은 여류 명인전을 3연패하고 여류 기성전 타이틀도 갖고 있는 여류 최강자. 김 5단은 "채영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농심새우깡배 꿈나무부에서 최정에게 이겨 우승한 뒤에는 한번도 최정에게 이겨본 적이 없다. 연구생도 최정이 빨랐고, 입단도 그랬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채영 양도 타이틀을 하나 따냈기 때문이다. 김채영 초단은 4일 열린 여류 국수전 결승 3국에서 박 9단의 어이 없는 실수로 불계승을 거뒀다. 생애 첫 우승이다.

김 5단에게 "요즘 채영 양과 바둑을 두는 지" "부녀간에 실력은 누가 나은 지" 물었다.

"중 1 때 채영이가 바둑을 하겠다고 한 이후에는 바둑을 둔 적이 없는 것 같다. 몇 년 전인가 바둑TV 추석특집 때 권갑용 사범과 효진 양, 그리고 나와 채영이가 부녀기사 페어전을 둔 적이 있다. 채영이하고 두면 내가 지겠지요."

그는 33세의 늦깎이로 입단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렸을 때 바둑을 배워 충암중 1학년 때 잠시 한국기원 연구생을 한 적이 있다. 부모님이 "바둑 말고 공부를 해야지"라고 해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바둑판을 미뤄뒀다. 그러고는 명지대 영문과에 합격한 뒤 바둑돌을 다시 잡았다. 실력이 녹슬지 않았는지 대학 2학년 때 대학패왕전에서 우승했다. 군대는 카투사로 2년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9년 해동화재에 입사했다. 주로 보험심사과에서 7년을 근무해 대리까지 승진도 했다.

김성래 5단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보급활동을 할 당시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과 관광지에서 한 컷. 김성래 5단 제공

물론 가끔 바둑은 뒀다. 1995년 11월에 열린 아마국수전에 4강까지 올랐다. 어렸을 때 같이 바둑을 두던 김세현 아마7단이 이 대회에서 결승에 오른 것을 보고 바둑 공부를 다시 하기로 마음먹었다. 직장 생활에도 회의가 일던 때였다. 임신 중인 아내 이소윤 씨(당시 30세)가 흔쾌히 허락했다. 그해 태어난 아이가 채영이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다. 운이 좋아서인지 그해 입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입단한 뒤에는 그는 구수한 입담으로 바둑TV 해설자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어느 날은 보니까 생방송 프로그램 2개에 녹화 프로 2개 등 내 모습이 하루에 네 번이나 나온 적도 있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명지대 바둑학과에서 강의도 맡고 있었다. 방송이냐 교수냐를 고민하다 방송을 접었다. 그리고 명지대에서 6년 정도 강의를 했다. 한 학기에 11학점을 강의한 때도 있었다. 용인시내에서 2년 정도 기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수가 되지는 못했다.

대학 강단에 설 무렵부터 쓸 만한 바둑책이 없어 아쉬워했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부터 바둑 책을 쓰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그가 쓴 책은 지금까지 40권 정도. '동형반복 실전사활(2000년)' '한국바둑 왜 강한가(2002년)' '스피드바둑 시리즈 1, 2, 3(2003년)' '21세기 신정석과 포석' 등이다. 그는 2001년 '한국고대바둑보급에 대한 연구'로 명지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Korea style of Baduk'이라는 영문 바둑책도 냈다.

"당시에는 일본 바둑책을 번역해 짜깁기한 책들이 많았다. 책을 쓰는 게 돈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 기사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바둑 책이 필요하다고 느낀 내가 나섰다. 한 권 쓰면 주로 매절 형식이어서 100만 원 정도 받았을까. 한번 책을 쓰고 나면 '다시는 안 쓸 것'이라고 다짐해보지만 그때뿐이었다. 좋은 책을 만들어보자는 욕심도 있었다. 지금도 지방에 다니다 보면 '21세기 신정석과 포석이라는 책을 잘 읽었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보람을 느낀다."

김성래 5단이 운영하는 육형제바둑문화센터에서 열린 바둑대회. 김성래 5단 제공

어떤 계기로 해외에서 바둑 보급 활동을 했는지 물었다. 계기는 2009년에 킹스필드라는 업체가 문화사업 차원에서 횡성에 폐교를 리모델링해 만든 바둑학교에서 강사를 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외국인 20여 명에게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바둑 공부를 가르쳤다. 그때 외국인에게도 바둑 보급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업은 그 업체가 망하면서 중단됐다.

때마침 2010년 대한바둑협회에서 해외 바둑보급에 나갈 프로들을 모집했다. 김 5단은 자원해 그해 6월 이영신, 고주연 프로와 함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유럽바둑센터를 만들었다. 한국 바둑을 알리는 전진기지였다. 이곳에서 바둑을 가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바둑 보급을 위해 작은 강사료도 마다않고 유럽 전역을 누비며 한국 바둑을 알렸다. 1년 반 동안 그는 일을 재미있게 했다. 하지만 한국에 가족을 두고 외국에서 혼자 바둑보급을 하는 일에 마냥 매달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국기원에 후임자를 요청하고 유럽바둑센터를 그냥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는데 후임자도 없고 예산도 문제가 돼 2011년 12월 접고 돌아와야 했다.

그는 두 가지가 아쉽다고 했다. 그 하나는 자신이 추진하던 유럽 프로제도 도입이 이제는 몽땅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것. 중국이 '공자문화센터'를 앞세워 중국 바둑 홍보를 하는 데 우리는 이제 손도 쓰지 못하게 됐다는 것.

또 하나는 유럽바둑센터라는 한국바둑 전초기지가 사라진 것이다. 그는 "유럽바둑센터는 비자문제가 해결돼 바둑보급의 전진기지로 아주 적격이었다"며 "유럽바둑센터 폐쇄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기원의 패착"이라고 말했다.

김 5단은 유럽에서 바둑을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부정확한 한국의 단과 급수 문제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유럽에서는 대회가 열릴 때마다 성적을 집계하는 시스템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내가 몇 위인지를 알 수 있다. 예컨대 바둑 두는 사람이 10만 명이라면 등수가 1등부터 10만 등까지 쭉 매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바둑대회에 나가서도 내가 이번에는 순위를 100등을 올려야지 하는 기대가 있다. 우리는 아마추어 단증이나 급증이 남발돼 순위를 매길 수가 없다. 어떤 경우는 급수를 속여 바둑대회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부터라도 한국기원이 나서 이를 고쳐야 한다. 단급이 정확하면, 예컨대 내가 바둑 순위가 몇 등이고, 성동구에서 가장 잘 둔다는 통계도 나올 수 있다. 그러면 여러 종류의 바둑대회를 열 수 있고, 이게 바둑에 대한 수요를 창출할 수도 있다."


윤양섭 전문기자lailai@donga.com